[오피니언] 독재자가 예술가를 두려워하는 이유 [문화 전반]

소설 <1984>와 베르그손 미학 함께 읽기
글 입력 2025.01.22 18:4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991673938_myP7Zf21_curious-about-all-about-all-r3JuzUFgCMI-unsplash.jpg


 

독재자는 왜 예술가를 두려워하는가? 예술은 사람들이 생각을 확장하고 현실을 재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술은 세상을 전복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소설 <1984>에서는 이러한 예술의 힘에 대조적으로 반응하는 주인공과 당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주인공은 예술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함을 인식하고 저항하는 반면, 당은 창조적 사고를 경계하고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당은 사람들의 직업, 생활 패턴, 먹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제한다. 베르그손의 입장에서, 이러한 <1984> 속 사회는 ‘닫힌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베르그손은 사회적 압력 과 비인격적 규칙으로 가득 찬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창조적 정서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창조적 정서는 예술의 기반이자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84> 속 예술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통해 예술의 가치를 찾고, 예술을 통한 열린 사회로의 이행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진리의 인식


 

<1984> 속 당은 사람들이 하나의 대상에 대해 하나의 관념만을 갖도록 하는 것에 몰두한다. 당은 ‘진실부’라는 부서를 만들어 모든 정보와 매체를 통제한다. 신문, 영화, 교과서, 연극, 서정시에서 생물학 논문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정보와 오락거리는 당에 의해 제작되고 배포되었다.

 

심지어 신조어를 통해 대상을 표현하고 설명할 단어마저 없앤다.

 

 
“신조어의 최종 목표가 사고의 범위를 좁히는 데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결국 우리는 문자 그대로 사상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될 거예요. 그걸 표현할 단어가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필요한 개념은 모두 정확히 ‘한 개의’ 단어로 표현하게 될 거예요.”
 

 

이렇게 과거어는 사라지고, 결국 과거의 문학마저 파괴된다. 셰익스피어, 밀턴, 바이런의 작품은 오직 신조어판으로만 존재하게 되고 고전 문학작품이 주는 울림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당이 예술을 경계하고 통제하려는 이유는 예술이 생각의 확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은 ‘기록’이라는 예술을 통해 당에 저항하고, 생각의 그물을 넓혀간다. 그는 과거를 기록함으로써 당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하고, 과거와 현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살아간다. 기록을 시작한 이후로, 윈스턴은 위험을 마주하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혼란 속에서 실존과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한다. 진리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를 베르그손 식으로 표현하자면, 윈스턴이 예술을 통해 진리에 대한 암시를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베르그손은 예술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창조성을 띠며, 그 진리를 지시적인 언어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은 진리로 다가가기 위한 일종의 다리이며, 그 과정에서 감상자 스스로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윈스턴이 진리에 다가가기까지 혼란을 겪은 이유와 당이 예술을 통제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의 재인식


 

또한 예술은 현실을 재인식하게 만든다. <1984>에는 윈스턴이 주변에서 들리는 노래와 주변 상황을 함께 서술하는 장면들이 많다.

 

 

“그런데 그때, 아마 기껏해야 모두 해서 30 초쯤 됐을 텐데, 텔레스크린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흘러나오던 노래의 곡조가 바뀌고 음조도 달라졌다.(후략)”

 

“신기하게도 그 동요를 부르면 실제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기억에서 잊힌 채 아직 남아 있는 저 사라진 런던의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지난 몇 주 동안 런던에서 들을 수 있던 노래였다. (중략) 그러나 그녀가 너무도 아름답게 부르니 형편없는 노래가 거의 듣기 좋을 정도로 다르게 들렸다.”

 

 

윈스턴은 음악을 통해 내면과 외부 상황의 변화를 인식한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별 의미 없이 지나쳤을 순간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에는 흘러가는 현실에서 변화를 인식하고 새로운 감각을 끌어내는 힘이 있다.

 

이를 베르그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베르그손은 예술의 목표는 인간의 인격성이 발휘하는 저항적 힘을 잠재우고, 인간을 완벽한 유순함의 상태로 유도하는 것이며, 그 유순함 속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암시된 관념을 실현하게 되고, 표현된 감정과 공감하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 내면에는 각각의 고유성이 있기 때문에 외부의 영향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내면의 고유성을 유지하려는 힘을 잠재우고 외부의 어떤 암시에도 쉽게 따를 수 있을 만큼 감상자의 감상과 지성을 유연하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외부 대상을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재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감상자는 예술을 통해 진정한 실재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대상의 본질을 인식하게 된다.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베르그손은 위와 같은 예술의 특성을 통해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그는 사회를 지배하는 도덕과 종교의 본성을 통해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를 구분한다. 닫힌 사회는 금기와 독단이 지배하는 억압된 사회이며, 개인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사회 구성원들을 결속시키려는 전체주의 사회이다. 닫힌 사회의 도덕과 종교는 생물학적 본능과 습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닫힌 사회의 도덕은 사회적 압력과 의무의 도덕인 셈이다. 반면, 열린 사회는 이기적인 생존에 몰두하는 폐쇄성을 넘어서 동적인 사랑과 창조적 정서, 인류의 진보를 열망하는 사회이다. 열린 사회의 도덕과 종교는 자연적 상태의 인간의 조건과 본성을 넘어 새로운 종으로 인류의 도약을 실현하도록 인간성을 고양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닫힌 사회가 인간 사회의 자연적 양상이라면, 열린 사회는 인간 사회의 이상적인 양상이다. 그는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확장’의 방식으로는 결코 나아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콩트와 뒤르켐이 교육된 이타주의와 헌신의 정신이 확장되어 국가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박애로 확산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그는 이기주의(조국애)의 영역이 넓어지면 이타주의(인류애)가 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사물의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환원해버리는 오류라고 말한다. 열린 사회의 탈국가적인 사랑은 단지 사랑의 대상을 확대한다고 도달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적 정서를 통한 이행


 

그렇다면 어떻게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의 이행을 통한 인간 사회의 진보가 가능할까? 베르그손은 이에 대한 해답으로 ‘창조적 정서’를 제시한다. 대상의 양적인 확장을 통한 진보가 불가능하다면, 질적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식과 행위의 구체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실천 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압력과 지성이 아니라 ‘창조적 정서’라고 주장했다.

 

베르그손이 주장하는 창조적 정서는 예술과 깊은 연관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예술은 인간 내면의 고유성을 잠재우고 외부의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을 깨운다. 감성이 깨어나면 실재하는 진리라고 믿어왔던 맹목적인 관습과 사회적 의무를 의심하고 새로운 도덕 규칙을 창안하게 된다.

 

이러한 예술의 창작과 수용의 기저에 있는 것이 바로 창조적 정서이다. 창조적 정서는 어떤 표상으로부터 받은 주관적 느낌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장차 관념들, 표상들, 이론들로 결정화(cristalliser) 되는 힘을 갖는다. 이렇듯 예술가의 창조를 이끄는 영감이자 인간 행위를 변화시키는 기본적인 역량이 바로 창조적 정서이다. 자동화된 습관이나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서 오는 도덕은 닫힌 사회의 것이지만, 창조적 정서를 통해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의 힘으로 시행되는 도덕이 바로 열린 사회의 도덕이다.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 기존의 표현 형태들로는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없는 새로운 느낌이지만 어떤 관념들이나 표상들의 체계로 이론화하고 싶고 어떤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싶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창조적 정신의 힘이다.”
 

 

<1984>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술의 가치는 크게 ‘진리의 인식’과 ‘현실의 재 인식’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예술의 효용을 ‘진리의 암시’, ‘감상자의 유순함’이라는 베르그손의 입장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윈스턴은 예술을 통 해 전체주의적인 당과 현실의 불합리함을 깨닫고 저항했다. 이렇듯 예술은 개인의 고유성을 잠재우고 감성을 일깨워 현실을 의심하도록 한다. 예술에서 비롯된 창조적 정서가 개인의 도덕적 행동을 일으키는 ‘실천 의지’를 직접 자극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창조적 정서를 통한 실천 의지의 변화를 통해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 회로 나아갈 것을 강조한다. 창조적 정서는 단지 대상의 확장이 아니라, 대상의 ‘질 적 도약’을 일으켜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의 이행을 가능케 한다. 예술의 의무 감의 도덕에서 자행하는 도덕으로의 전환을 통해 열린 사회로 나아가게 된다. 이처럼 창조적 정서에서 촉발되어, 개인의 인식을 전환시키고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이 예술의 가치이자 효용이라고 할 수 있다.

 

 

[김민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5.02.0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5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