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식는 시간을 견뎌낸 뒤 남는 단단함이란 - 쿠키, 앤, 크림 [공연]

글 입력 2025.01.0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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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엇을 했는가. 나는 여러 기쁜 일들이 겹쳐, 다소 정신 없지만 마음이 풍족한 연말을 보냈다. 거대한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아보기도 하고,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의 혼인 예식을 지켜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내가 사랑하는 프로젝트 팀인 ‘트렁크 씨어터 프로젝트’가 신작으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트렁크 씨어터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트렁크 씨어터 프로젝트는 어디서든 펼칠 수 있는 컴팩트한 무대를 지향하며, 연극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색에 대해 고민하는 팀이다. 트렁크 하나에 실을 수 있을만큼 컴팩트한 소도구들을 잘 활용한다는 점은 이 팀을 사랑스럽게 만든다.

 

유난히 트렁크 씨어터 프로젝트를 애정하는 이유는 소도구를 활용한 연출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참 따스하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극장에서 마주하는 따스한 이야기는 과도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경쟁을 위한 경쟁으로 목적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연극은 무엇을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지 묻는다.

 

이번 신작 <쿠키 앤 크림>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백야가 이어지는 12월의 남극, 하얀 풍경 속에 떨어진 까만 운석은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 빙하가 녹는 속도가 빨라진 탓에 남아있던 운석이 빠르게 유실되어갔고, 이에 누구나 운석을 사고파는 일이 가능해졌다. 짧은 여름이 허락한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운석을 찾아내야 했다. 사람들은 남극으로 몰려들었고, 앤도 그들 중 하나였다. 연극은 우리에게 그 삶의 목적이 대체 무엇인지 질문한다.

 

주인공 앤은 자신의 젊음과 에너지를 운석을 줍는 데 쏟아붓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점차 목적을 상실한 채 그저 반복하는 일상이 되어버린다. 공연은 주인공 앤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젊음을 바쳐 하고 있는 그 일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요?’ ‘그 일을 왜 하고 있나요?’

 

드라마터그의 글에서도 나타나듯, 이 작품은 ‘식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뜨거운 열정이 사그라드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앤은 그 과정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따뜻함을 느끼며 성장한다. 내 마음이 뜨거울 때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에 품은 그것만 보일 뿐이다. 천천히 마음이 식길 기다리며 생각해보자. 나는 처음에 왜 이것을 내 마음에 담았을까. 잠잠히 생각하다보면 나를 둘러싼 세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뜨겁게 끓고, 녹고, 식는 시간을 거치며 점점 단단해지는 행성은 충돌하고 조각이 되고 그 조각들은 다시 서로를 당기고 합쳐지며 다시 새로운 행성을 만들어낸다. 앤은 이제야 식는 시간을 보내고 단단해지는 중이다. 파고 헤치고 짊어지고 뚫고 가는 것만을 배워왔던 그는 처음으로 당기는 힘에 그저 이끌려가 본다. 뜨거운 열정으로 깃발을 들고 정상 위에 우뚝 서는 이야기도 의미 있지만 그저 걸으며 낯선 존재와 만나고 감히 넘겨짚지 않는 법을 배우며 식는 것을 감각하는 이야기는 참 귀하다.
 

 

이러한 연출의도는 극 중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빙하와 눈, 별 조각 등을 활용해 만들어진 무대는 지구의 형성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며 관객에게 생명과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영겁의 시간을 담은 별의 조각’이라는 상징은 단순한 운석 채집을 넘어 앤이 삶의 깊이를 탐구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우리가 삶의 파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부딪히고 깨어지는 경험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연극의 상징적인 소도구와 장갑 인형의 활용은 트렁크 씨어터 프로젝트 특유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특히 인형을 통한 동물 묘사는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며 관객이 공연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인형을 통해 생태계를 표현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의 질서와 생명에 대해 탐색하게 한다. 간소한 무대 구성 속에서도 풍부한 이야기와 정서를 전달하는 이들의 연출력을 애정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남극의 여름이라는 배경은 관객들에게 독특한 몰입감을 제공한다. 여름이지만 밤이 없는 남극의 독특한 환경은 목적을 상실한 채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앤을 그의 한계까지 몰아 붙인다. 짧은 여름 동안 최대한 많은 운석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 속에서 앤이 발견하는 ‘예상치 못한 조각’은 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트렁크 씨어터 프로젝트의 특별한 커튼콜 역시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트렁크 씨어터 프로젝트는 극 중에서 카메라나 빔프로젝터를 활용한 연출을 이용한다. 커튼콜에서도 그 장치들을 동일하게 이용하는데, 영화에서는 크레딧이 올라가는 반면 이들은 스케치북에 크레딧을 적어 카메라에 비추는 방법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참 재치있고 기발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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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런 따뜻하고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주는 트렁크 씨어터 프로젝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특별히 실시간으로 음악을 만들며 공연에 생동감을 더하는 악사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 팀이 더욱 활발히, 자주 공연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은 모두가 혜화의 자그마한 극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따뜻한 마음으로 이뤄진 느슨한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쿠키 앤 크림>을 보고 먹으러 간 쿠키 앤 크림 아이스크림 사진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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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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