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순수한 소설적 반성문 [도서/문학]

박민정, 「세실, 주희」
글 입력 2022.09.1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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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고민의 산물이다. 쓰는 이의 창작적 고민과 읽는 이의 감상적 고민이 소설을 통해 조우한다. 쓰는 이의 고민이 소설 속에서 잘 해소된다면 읽는 이가 감당할 고민의 무게는 감량된다.
 
소설이 고민을 끝내 해결하지 못(안)하면, 나머지 고민은 독자의 반추로 남는다. 고민이 해소되면 희열이 찾아오고, 고민이 깊어지면 반성이 드리운다. 소설이 남겨둔 고민을 음미하는 일 또한 독자의 즐거움 중 하나일 것.

그리고 반성에 대한 박민정의 단편 소설 「세실, 주희」를 읽는다.

주희는 친구 J를 따라 미국 여행을 떠난다. J가 아니었다면 “미국 여행은 꿈꿔볼 수도 없었”을 주희에게 그곳은 낯선 나라다. 행선지를 정하는 일도, 숙소를 구하는 일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주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이처럼 J를 따라다니는 일뿐이다. 물론 “버번 스트리트와 로열 스트리트 쇼핑몰”을 천국처럼 느끼던 주희에게는 그런 여행조차 제법 만족스러웠을 테다. “아주 잠시 동안 벌어졌”던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J를 따라 “마르디 그라(Mardi Gras)” 축제에 간 주희는 끔직한 일을 겪게 된다. “자유와 해방”을 운운하는 축제에서 “마음껏 먹고 즐기”며 “술과 마약에 취”한 사람들은 주희를 둘러싸고 희롱한다(“show your tits!”). 이 두려운 경험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는데, 주희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갔기 때문. 불쾌한 경험은 지울 수 없는 생생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지만, 주희는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수습할 방법조차 찾을 수 없었으니, 회복을 위해 주희에게 강요된 방법은 자기반성뿐이다. (“주희는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던 그때의 자신을 깊이 저주했다.”)
 
어떤 죄악에 휩쓸렸을 때, 그 죄악이 너무나 거대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결국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는 것. 물론 피해자가 피해 입은 스스로를 자책하는 가혹한 구원의 방법은 영혼을 더욱 병들게 할 테다. 그리고 이토록 지독한 구원의 늪에서 주희는 세실을 만난다.

명동에 있는 뷰티 편집숍 ‘쥬쥬하우스’의 매니저가 된 주희는 그곳에서 일본인 직원 세실을 알게 된다. 세실은 단지 한국의 아이돌 가수에 대한 애정으로 한국살이를 하게 됐음을 고백한다. 주희는 그런 세실의 삶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에게서 막연히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었던 자신을 떠올린다. 소설의 제목처럼 주희는 세실, 로부터 그녀 자신을 알게 될 것이다.

세실의 한국어 수업을 맡아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주희는 어쩐지 불편해진다. 세실이 ‘예쁘다’는 외모 평가를 서슴지 않고 “한국 여자는 성형을 많이” 한다며 일반화시키는 것도, 세실의 조상이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종군간호부 역할을 했던 ‘히메유리 학도대’ 출신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그런 조상들의 순결(아마도 기록과는 달랐을)과 희생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도. 주희의 이 불편함은 아마도 거대한 젠더 담론이나 역사적 이데올로기와는 다소 거리가 먼, 자신과의 동일성에서 오는 불편함이었을 테다.

자신과 다르면서도 닮은 세실의 존재를 통해 주희는 어슴푸레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순진한 세실의 믿음은 주입된 순수에서 비롯된 무지이므로 세실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 마찬가지로 J의 모습을 은밀히 동경하며 그녀를 따라 축제에 갔던, 그래서 포르노 사이트에 얼굴이 올라가게 됐던 순진한 자기 자신을, 비록 “비참해”도,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것.
 
 
J처럼 무람없이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보고 싶었고, 그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 끝이 고작 포르노 영상이 되리라고는 주희는 예상하지 못했다. J는 미국인 남자애들과 우르르 일어서며 주희에게 피곤하면 안 가도 돼, 여기서 좀더 마시고 있어, 라고 말했고, 주희는 아니, 따라가고 싶어, 대답했다. 따라가고 싶어. 그 말을 했던 자신을 생각해내자 비참해진 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뉴올리언스 펍에 앉아 있던 자신”과 위안부 “집회의 행렬에 동참”하게 된 세실은 다르지만 같다. 함께 걷는 크리스마스이브의 거리. 위안부 집회와 소녀상의 의미를 세실은 여전히 모른다.
 
주희는 세실이 모르는 채로 둔다. 그녀는 그렇게 그녀 자신을 용서하는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피해자가 피해자를 위해 쓰는, 이렇게 대책 없이 순수한 반성문 같은 소설도 있다. 물론 반성해야 할 주체는 주희도, 세실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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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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