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상을 관찰하는 아웃사이더 -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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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는 콘텐츠에는 항상 셀링 포인트가 있다. 비비안 마이어의 경우 신비주의자라는 점이다. 죽은 후에야 인정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유모 일을 하며 교류 없이 지내던 한 여자가 죽고 재산이 창고 채로 경매에 넘어갔으며 누군가 그걸 사들였고 안을 보니 수집벽이라고 할 정도로 물건이 많았다. 그 사이에서 15만 점 이상의 사진들이 발견된다.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찍은 사진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방치했다. 사후에야 그녀의 사진은 빛을 보게 되었으며 기록 사진으로도 사진 기법적으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이었다.
호기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서사였고 그녀의 삶과 사진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지 궁금해졌다.
세상을 관찰하는 아웃사이더
그녀는 적은 개인적인 인간관계 내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전시에서 그녀 생전의 모습을 증언한 것이 겨우 그녀가 키웠던 아이들과 단골 가게 사장님 정도였다. 배우자나 자녀는 없고 타지의 제한된 만남 속에서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그는 위장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목에 작은 카메라를 매달고 다니며 눈높이보다 아래쪽에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찍히고 있는지를 쉽게 인지하지 못했다. 자연스러운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을 수 있었고, 이는 그가 안전한 거리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그녀가 찍은 인물들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기도 하고 또 가끔은 카메라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기도 했다. 수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즐거움이 되었다. ‘눈꼬리에 웃는 주름이 잡힌 걸 보니 이 사람은 그래도 긍정적으로 삶을 살려고 했나 봐’, ‘뭔가 고리대금업자일 것 같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그녀는 꽤 공평한 사진사였다. 그녀가 미국에 살던 때 아직 인종 분리 정책이 있을 만큼 인종 차별이 심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편견 없이 다양한 인종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성과 여성, 노인과 아이, 다양한 인종들의 이야기. 그들의 찰나의 표정과 옷차림. 그녀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우리는 조금 그녀를 읽었던 것 같다. 그녀에 관해 더욱 궁금해졌다.
자신까지 관찰하고 기록하던 사람
사진은 세상에 비비안의 존재를 입증하던 일이기도 했다. 비비안의 독특함을 기억해줄 가까운 주변인들이 없었던 대신, 그녀는 자신을 끊임없이 기록했고 수백장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다. 요즘 같은 selfie가 없는 시대에 자화상을 찍기 위해서는 상을 반사하는 물체가 필요했다. 수면이나 거울, 그림자 등에서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으로 남긴다. 그녀는 애써 웃거나 꾸미려고 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남기려고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진은 둥근 구조물과 스스로의 그림자를 찍은 사진이다. 친구와 동시에 이 사진을 보고 “이거 혹시 자궁 아냐?”라고 말했다. 전형적인 여성으로서 살지 않다가 여성의 신체임을 인식한다면 이런 사진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가 자신의 성별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은 돌연 찾아오지 않는가. 갑작스럽게 생리가 시작되었거나 가슴이 아릴 때, 또 그날이 돌아온 것을 느끼게 된다. 왠지 그녀가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둥근 기둥이 교묘한 위치에 놓여 있을 때 굳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된 심정이 있었을 것만 같다.
사진 세계의 다채로움
그녀의 사진은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변곡점을 보이는 두 시점이 있었다. 한 번은 세계여행을 떠났을 때고 다른 하나는 컬러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후이다. 그녀의 사진은 대개 인물의 웃는 모습을 담고 있지 않다. 특히 자화상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세계 여행을 떠나 일상에서 분리된 이후 그녀는 기쁜 감정을 온전히 사진에 담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사진을 보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또, 컬러 사진을 찍으면서 그녀의 작품은 약간의 굳어있고, 절제된 감정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색을 입은 듯 보였다. 작품 설명에서는 그녀의 컬러 사진을 ‘흑인들의 음악인 블루스 같다.’라고 설명하기까지 한다. 블루스는 흑인들의 애환과 고뇌가 담긴 음악이다. 색깔을 얻은 사진은 그녀의 슬픔과 다정함을 입고 훨훨 날았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사진을 찍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직접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유모로서 어린 시절부터 길러낸 아이들과 함께 남긴 기록은 그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게 했다. 특히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찍은 사진들은 똑바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고유함을 온전히 담으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아이들과 역할극 놀이를 하던 영상은, 그녀가 아이들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시도와 애정까지 담겨 있다. 아이들과 함께 보낸 40여 년의 시간은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시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는 그녀의 생애에 대단히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다. 사진과 사후 발견한 여러 소지품을 통해 그녀를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그녀가 실존 인물인지 몇 살인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지만 다만 그림 속의 모습을 통해 그녀를 유추해낼 뿐이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눈빛을 보면 그 삶의 궤적을 궁금해하며 매혹되는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보는 내내 그녀에게 약간은 홀린 기분이었다. 이 사람 뭘까. 수없이 많은 것을 기록했으면서 아예 필름을 인화하지도 않고 쌓아두는 건 무슨 마음일까? 몰래 찍은 사진을 내놓기는 부끄러웠을까? 망한 그릇을 깨부수는 옹기장이의 마음일까? 아니면 그저 개인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의미를 두며 블로그에 글을 쓰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일까?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만 그녀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붙여준 ‘시카고(Chicago)’, ‘거리(Streets)’ 이렇게 그저 단어에 지나지 않는 제목 말고 그녀가 직접 붙인 사진의 제목. 그녀가 애써 머릿속에서 써낸 작품에 대한 설명. 그런 걸 읽으면서 그녀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알아갔으면, 우리는 더 구체적인 메세지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신비하고 외로운 여성이 어쩌면 더 콘텐츠 적으로 매력적일 수는 있으나, 조금은 정치적이고 개인적이고 날이 서 있는 그녀의 표현을 읽는다면 이보다 더 알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발견한 것은 홀로 선 한 여성과 그녀가 뷰파인더로 바라본 세계였다. 그녀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과 화해하기까지. 스스로와 타인,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무르익은 시각이 분명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본 세상이 궁금하다면 꼭 한번 보기를 추천한다.
[고승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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