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애프터 양'이 묻는 '인간'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 [영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글 입력 2022.08.1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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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 건강 악화와 빈곤, 딸의 죽음 등 극단적인 시도를 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에 그린 자신의 작품에 직접 붙인 제목(원제 : Doù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이다.

 

한국에서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인간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한 캔버스에 담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 혹은 근본에 대해 묻는 그의 작품과 제목을 그의 상황과 연결 지어 보면,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해 되물었을 고갱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착잡하기도 하고, 여러 복잡한 생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어쩌면 이 제목은 고갱과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깊숙한 곳에 품고 있을 의문일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사회가 변화해 감에 따라 우리 삶과 사회 안으로 불쑥불쑥 떠올라 함께 합의한 윤리와 원칙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특히 이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으로서 우리 존재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소위 ‘뿌리’라고 하는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표현이 더 많이 이루어지는 요즘 더욱 중요해진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섬세한 시선으로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그려온 코고나다 감독은, 영화 <애프터 양>을 통해 그만의 절제된 연출로 이러한 질문을 풀어 놓는다. 영화는 입양된 아이들에게 그들의 ‘뿌리’를 연결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세컨드 시블링’이자 ‘문화 테크노 사피엔스’인 ‘양(YANG)’과 그를 구입한 ‘미카’네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양’은 미카에게 태어난 곳의 문화를 알려주고 미카의 다정하고 든든한 오빠가 되어주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전원이 꺼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들은 ‘양’의 기억 혹은 ‘양’과 기억을 돌아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양’의 존재에 대해 정의하고 ‘양’이 없는 앞으로를 마주한다. 영화 속 미카의 가족 안에서 갑자기 비어버린 ‘양’의 자리에는 결국 우리 ‘인간’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꾸미기][크기변환]포스터 (2).jpg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 우리를 ‘연결’하는 ‘뿌리’의 존재


 

코고나다 감독은 전작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에서는 한인 이민 가족 4대의 삶을 그려냈고, 본인 역시 미국계 아시아인 혹은 미국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왔다고 밝힌다. 이러한 그의 고민이 영화 안에서도 반영되듯, 문화적 정체성으로서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작품 곳곳에 녹아 들어 있다. 우리에게 ‘뿌리’라는 것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와 ‘뿌리’의 연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미카는 중국에서 ‘카이라’와 ‘제이크’ 부부에게로 입양되었지만, 미카의 (양)엄마 ‘카이라’는 유독 미카와 미카의 ‘뿌리’를 연결해주는 것이 (양)부모로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미카에게 중국의 문화를 알려줄 ‘세컨드 시블링’, 즉 ‘중국 입양아용 형제자매’ 제품이었던 ‘양(YANG)’을 구입한다.

 

 

"그냥 애를 키우는 게 아니라

미카의 문화와 유산을 연결해 줘야지.

그건 우리 책임이야."

 

 

처음에는 카이라가 왜 그렇게 ‘뿌리’를 강조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짜맞춘 듯이 백인, 흑인, 그리고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미카네 가족 역시 감독의 의도가 너무 뻔히 보이는 설정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스스로의 정체화만으로 규정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수많은 이민 가정의 아이들이 스스로의 인식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듯이 말이다.

 

특히 미카는 입양으로 인해 태어난 곳의 문화와 어렸을 때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다. 그렇기에 카이라는 어쩌면 미카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 필요할 수 있는 지식이나 소속감 혹은 유대감 같은 것을 채워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찌보면 미카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 자원이자 자산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양’이 미카에게 ‘접목’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꾸미기][크기변환]스틸컷_접목.jpg

 

 

"하지만 두 나무는 모두 중요해.

이 나무뿐 아니라 가지를 잘라 온 나무도.

다른 가족 나무도 너한텐 중요한 일부야."

 

 

학교에서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묻는 아이들에게 상처받은 미카는 ‘양’에게 지금의 부모님이 ‘정확히 말하면’ 진짜 부모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양’은 미카에게 다른 나무에서 가져온 가지를 붙여 하나의 나무가 되는 ‘접목’에 대해 말해준다. ‘양’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뿌리’를찾는 것은 어떤 하나의 ‘근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 살펴 돌아보며 제대로 마주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도 국적이나 혈연, 자신이 소속해 있는 문화권 등이 꼭 정체성의 형성에 있어 소위 ‘뿌리’가 되는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것들 각각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즉 자신의 ‘뿌리’를 알고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자 기준일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인 영역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합쳐져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인지를 든든하게 지지해줄 수 있는 ‘뿌리’를 혹은 ‘뿌리’라 여길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 역시 그곳에 잠시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우리는 무엇 혹은 누구인가? : 인간의 근본 혹은 기준에 대한 물음


 

인공지능을 넘어 인공감정, 또 복제인간까지…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기준과 능력의 ‘고유성’이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온전히 인간과 같은 수준의 ‘자아’을 가지고 감정을 느끼면서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인공적인 존재를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아직 좀 더 요원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이에 앞서 그것이 인간 사회에 정말 필요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할 것이고, 이를 위해 합의하고 조정해야 할 수많은 조건들에 대한 논의가 기술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윤리나 철학, 법과 인지과학 등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양’은 스스로에 대한 인지가 있고, 눈 앞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공감정’의 단계까지 온 존재로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양’과 같은 클론들을 ‘테크노 사피엔스’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새로운 종류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양’을 온전한 ‘인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완전히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양’의 각 부분이 해체되어 그저 ‘부품’으로 여겨졌을 때 혹은 결국 ‘양’은 제이크와 카이라가구매한 ‘제품’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날 때, 제이크와 함께 관객들이 느꼈을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은 ‘양’이 이미 어느 정도 ‘인간’ 혹은 인간에 ‘준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하지만 동시에 미카의 가족 안에서 ‘양’이 구성원들과 맺는 관계를 보면 ‘양’을 온전히 ‘인간’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양’과 가족들이 맺는 관계가 감정적으로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미카는 ‘양’을 정말 ‘오빠’라고 여기고, 카이라와 제이크 역시 ‘양’과 일정 부분 감정적인 교류를 하지만, ‘양’이 표현하고 생성할 수 있는 감정에 있어 소위 말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양’이 결국 인간에 의해 특정한 사회적,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진 ‘제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긍정적인 감정만으로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할 수는 없다. 부정적인 감정이라 여겨지는 분노와 수치심, 공포 등은 인간의 생존과 삶을 이어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이며,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하고 각각의 상황에 적절한 대처를 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양’은 가족들에게 오롯이 헌신하며 부정적인 감정은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된 ‘안전한’ ‘제품’이다. 비록 ‘양’이 정말로 가족들을 소중히 여겼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프로그래밍에 의한 것인지 ‘양’ 본인의 의지인지는 요원하며, 이를 ‘헌신적인 아들’ 혹은 ‘좋은 오빠’라고 포장할 수는 없다.

 

 

[꾸미기][크기변환]스틸컷_애프터양.jpg

 

 

"양이 테크노인 걸 힘들어 했나요?"

 

"무슨 뜻이에요?"

 

"혹시 인간이 되고 싶었나 해서요."

 

"왜요?"

 

"아니에요."

 

"너무 인간다운 질문이지 않아요?

다른 존재는 모두 인간을 동경한다 생각하는 거요."

 

"그럼 한 번도 힘들어한 적 없어요? 의문을 가진 적도?"

 

"제가 알기로는요."

 


‘양’의 기억 속에서 복제인간인 ‘에이다’를 발견한 제이크는 에이다와 ‘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혹시 ‘양’이 스스로가 ‘테크노 사피엔스’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에 대해 ‘힘들어 했는지’ 걱정한다. 하지만 에이다는 이러한 질문이 너무 ‘인간 중심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양’을 인간으로 볼 수 있는지 따지며, 실제로는 굉장히 모호할 수 있는 ‘온전한 인간’의 잣대를 ‘양’에게는 엄격하게 들이미는 것부터가 이미 무의미한 것일지 모른다.

 

또한 이러한 질문을 하기 전에 이렇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뚜렷하게 나누어 보려는 시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 뒤에 내재되어 있는 편협한 인간중심적인 관점에 대한 인지와 인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양’이 가지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을 돌아보며, 우리가 다른 존재에게 과도하게 ‘인간성’을 부여하거나 ‘의인화’를 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인간의 고유성을 과신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고 경계할 수 있다.

 

사회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기준과 기능을 시험받는 일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시험받는 쪽은 기술로 인해 만들어진 것들이 아닌, 그러한 기술을 만들고 사용하는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 고유의 것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하나 둘 해체되는 낯선 상황에서 인간을 둘러싼 경계를 더욱 견고히 하려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우리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논쟁이 시작되는 데에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우리 인간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이룩해온 것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 ‘애프터 양’으로 그려보는 미래


 

영화 <애프터 양>은 제목 그대로 ‘양’의 전원이 꺼진 이후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인간의 경계가 점점 더 희미해지는 시대에 영화 속에서 ‘양’의 빈자리를 다루는 가족들을 보며,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지능과 로봇 등(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테크노 사피엔스’)과 우리가 일정한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영화는 절제된 카메라 워크로 최대한 고정된 앵글을 사용하여 ‘양’의 빈자리를 느끼는 제이크와 카이라, 미카를 관찰하듯 담아낸다.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양’의 전원을 켜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과 장소들을 찾아가는 제이크와, 이를 통해 볼 수 있게 된 ‘양’이 간직한 기억이다. ‘양’의 기억 속에서 ‘양’은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며, 구성원으로서의 ‘기능’을 해간다. 하지만, 가끔 어떤 질문들에서 말문이 막히곤 하는데, 가령 이런 질문들이다.

 

 

[꾸미기][크기변환]스틸컷_가족사진.jpg

 

 

"저도 차에 관해 더 깊이 느껴 보고 싶어요.

차에 관한 진짜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장소에 관해, 시간에 관해서요. 그러면..."

 

"뭐?"

 

"죄송해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어요."

 

 

"넌 행복해, 양?"

 

"저한테 맞는 질문인지 모르겠네요."



이러한 대화 속 ‘양’의 모습을 보면, ‘양’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만큼 스스로의 한계와 지켜야 할 ‘선’ 역시 넘을 수 없었던 것, 혹은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아를 통해 ‘양’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앞서 짚어봤듯 ‘양’과 가족들은 감정적으로 ‘일방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과 가족들이 맺는 관계가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양’의 기억 속에서 ‘양’은 항상 미카의 가족들 곁에서 그들을 기억 안에 담는데, 가족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는 과거 장면 중 처음으로 가족들과 한 화면에 등장한다. ‘양’은 가족들을 위해 카메라를 세팅하며 뷰파인더로 가족들을 오래 바라보다가 미카가 ‘이쪽으로 오라’고 부르자, 조금 망설이며 미카의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온다. 이렇듯 다른 가족들에게도 ‘양’에게도, ‘양’은 미카와 제이크, 카이라의 가족 구성원으로서 인지되었을 것이다.

 

다만, ‘양’이 ‘가족’으로서의 기능이 가능하다고 해서 혹은 ‘가족’으로서 인지되었다고 해서,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관계 맺음이 가능했다고는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비록 ‘가족’의 관계에 대한 정의와 그 범위 역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 왔지만, ‘양’과 다른 가족들이 맺었던 관계가 다른 가족들이 서로 간에 맺었던 관계와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양’이 가족들에게 부정적이거나 위험할 수 있는 감정과 욕구를 드러내고 이를 생성할 수 없는 일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결국 돈이라는 물질적 자원을 통해 ‘양’을 구매한 제이크과 카이라가 ‘양’에게 ‘소유주’로서의 권리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불균형적인 권력 관계를 맺는 가족들 혹은 다른 사회적 관계의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관계를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 포함할 수 있는 것인지, 건강한 관계 맺기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렇게 우리는 ‘양’과 같은 ‘테크노 사피엔스’를 인간 혹은 비인간으로 볼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이들을 동등한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더 넓게는 인간과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특히 ‘양’과 같은 수준의 ‘테크노 사피엔스’를 당장 구현하기는 어렵겠지만, 일정한 관계 맺기 기능을 수행하는 ‘사교 로봇’은 이미 시중에 판매되고 있으며 이를 위한 기술 역시 점점 정교화되고 있기에 더욱 이러한 질문은 유의미하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과 함께 기술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앞서, 모든 기술의 발전은 그 사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과 인공감정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이어 온 *천현득(2017)은 가까운 미래에 완전히 인간과 같은 감정 체계를 가진 ‘인공감정’이 구현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보며, 설사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진정한 감정을 가진 로봇을 인류가 원하는지’에 관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사회적 동물이고 타자들과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유전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만날 때, 그 대상의 심성 상태, 믿음, 욕구, 의도 등에 대해

자동적으로 추론하는 경향이 있다. (...) 현재의 조야한 로봇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쉽게 의인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앞으로 로봇을 인격화하는 정도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 천현득, 「인공지능에서 인공감정으로」, 『철학』 제131집, 한국철학회, 2017,

pp. 236-237.

 

 

인간이 사교 로봇을 더 신뢰하고 더 깊은 감정적 유대감을 형성할수록,

속임수나 조종의 가능성도 커진다. (…)

결국에는 인간이 로봇과 맺는 관계가 일방적이라는 사실조차

깨닫기 점점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 천현득, 「인공지능에서 인공감정으로」, 『철학』 제131집, 한국철학회, 2017,

p. 237.

 


사교로봇에 대한 과도한 의인화와 심리적 의존에 대해 경고한 그의 글을 읽으며, 그동안 인간과 인간, 또 인간과 다른 존재들이 가졌던 정서적 유대의 조건들에 대해서도 또 우리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범위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더욱 새로운 논의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의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어쩌면 미카네 가족이 마주한 ‘애프터 양’의 시기가 우리 앞으로도 훌쩍 다가 왔을지 모른다. 우리가 발전시켜온 우리의 역량과, 함께 이룩해 온 사회적 합의가 우리들을 어떤 미래로 데려다 줄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과 긴밀히 관계 맺는 기술의 발전에는 그만큼의 성찰 역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우리가 스스로를 가두던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더 다양한 존재들과 조화롭게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효중 컬쳐리스트 태그.jpg

 

 

* 천현득, 「인공지능에서 인공감정으로」, 『철학』 제131집, 한국철학회, 2017, pp. 217-243. 참고.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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