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로의 다름을 함께 짊어지는 일 -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거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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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어른’이 될까?
‘어른’이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독립’이라는 과제를 동반한다.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홀로설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스스로의 말과 행동,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이자, 오롯이 자신 그 자체가 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비유로서나 실질적으로나 자신이 먹을 것은 자신이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다소 원초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감정에 따라 양식을 구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래서 스스로 생존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오롯이 스스로로 존재하기 위한 다른 방식일 수 있을까?
아리안 루이스-시즈플루트 감독의 영화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거야>는 양식이 되어야 할 인간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뱀파이어 ‘사샤’를 통해 ‘홀로서기’의 조건에 대해, 더 넓게는 삶을 영위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진다.
사샤는 인간의 피를 먹고 살아야하는 뱀파이어지만, 사냥이 아닌 길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돌연변이’다. 그렇게 사샤는 직접적으로 사냥하기를 거부하고, 68년 동안 부모님이 구해오는 혈액팩에 기대어 살아왔다. (영화 속에서 뱀파이어의 평균수명이 정확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사샤의 고모는 371살로 드러났다.)
그리고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사샤의 송곳니가 나온 날, 부모님은 사촌 언니 ‘드네즈’의 집으로 사샤를 보내 ‘뱀파이어로서’ 살아남기 위한, 홀로설 수 있는 본능을 일깨우고자 한다.
"네가 배울 때까지만이야. 엄마와 나도 영영 옆에 있을 순 없잖니."
"아직 맛을 몰라 그렇지. 너도 결국엔 좋아할 거야."
"아뇨, 안 좋아질 게 뻔한데 괜히 인간들 죽이기 싫어요."
"죽이지 않아도 먹고 있잖니"
"그럼 굶어 죽을게요.“
사샤는 인간을 죽일 바에는 굶어 죽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심을 한다. 사샤가 인간에게 느끼는 동정심은 뱀파이어라는 정체성에도 맞지 않고 뱀파이어로서 생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온가족의 걱정과 빈축의 대상이 된다.
사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이 아닌 존재, 특히 인간에게 식용으로 여겨지는 동물들에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종종 가해지는 비난과 조롱이 떠올랐다. 그들의 동정심과 이로 인한 실천들은 누군가에겐 그저 위선으로, 본능을 거스르며 스스로를 (더 넓게는 인류 전체를) 해치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물론 다양한 사람들이 동물권을 주장하거나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이유가 꼭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지만, 사샤가 지닌 소수자성은 이들과 닿아있다고 생각되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동정심은 그저 오만이나 위선일 뿐일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누군가에게 그 감정은 너무나 절실하고 소중한 가치일 수 있다.
다만 사샤의 경우는 자신의 신념과 감정에 따랐을 때 죽음 말고는 별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극단적인 상황이긴 하다.
그런 사샤 앞에 ‘좋은 일엔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폴’이 나타난다. 폴은 또래집단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고, 선생님마저도 그를 문제아로 여긴다. 고통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현재의 삶에 큰 의미를 찾지 못했던 폴은 기꺼이 사샤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겠다며 그녀를 따라나선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줄 알았는데."
"고통을 두려워하는 걸 거야. 아님 외로운 거."
물론 고통과 외로움 뿐인 삶이라고 해서 지속할 가치가 없다는 말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폴의 말을 통해 삶의 조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고통과 외로움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누군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삶의 가치를 찾는다. 누군가는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꾸려가는 생활에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가치 없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의미와 가치를 품고 살아간다. 영화를 보며 사샤와 폴이 그랬듯 각자가 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에 따라 스스로의 존재를 마주하고,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도 성장을 이뤄가는 과정이 더 존중받고 응원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가 속한 사회 안에서 오롯이 홀로 설 수 없었던 폴과 사샤는 ‘홀로서기’대신 ‘둘로서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또 ‘뱀파이어’로서 규정된 정체성과 규범들을 넘어 서로의 ‘필요’가 되어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삶과 죽음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그들만의 대안을 찾아낸다.
그 대안의 옳고 그름과는 별개로, 위선이나 오만으로 혹은 미성숙함이나 일탈로 여겨졌던 폴과 사샤의 감정과 행동들이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것이 참 좋았다. 물론 사샤는 여전히 어리고 홀로서기에는 부족한 뱀파이어일지 모르지만, 사샤와 폴은 기꺼이 ‘둘로서기’를 선택하며 그들만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다름을 홀로 짊어질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다름을 함께 짊어지며 원하는 자신의 삶을 찾아 나갔다.
이렇게 영화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거야>는 당위의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삶과 죽음의 의미와 조건에 대한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 영화를 보며 매끄럽지 못한 후반부 전개나 캐릭터들의 미성숙함에도, 오히려 그들의 불완전한 홀로서기와 ‘둘로서기’를 응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명이나 연출, 음악이 잘 어우러진 미장센도 참 매력적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성장의 과정에서 이어지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다소 서툴거나 ‘별나게’ 여겨지는 것이더라도, 그것이 너무 외롭거나 아픈 결말로 닿지는 않기를 바라며 지금의 주변과 지나온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어쩌면 폴과 사샤였고 지금도 여전히 폴과 사샤일 모두에게, 그리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모두에게 조금은 유쾌한 위로와 응원으로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양자택일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것들에 ‘창의적이고 휴머니스트같은’ 또 다른 대안들을 함께 찾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효중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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