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I am More - 털 난 물고기 모어 [도서]

글 입력 2022.05.1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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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영화제였다. 모어를 알게 된 것은 2021년 11월 서울독립영화제에서였다. 찬 바람이 쌩쌩 불어오던 11월 29일, 나는 모지민 배우의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를 관람했다. 당해 서울독립영화제의 첫 관람 작으로 만나본 <모어>는 84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작품이었다. 나는 영화 속 모어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그가 세상을 향해 뿜어내는 온갖 신랄한 유머에 초반부터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모어’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도 흥미롭고 유쾌하여 자꾸만 알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객석 여기저기에서도 잔잔한 웃음들이 끊이지 않았다.


작품 설명란에서 모지민 배우는 ‘발레리나, 뮤지컬 배우, 안무가, 작가, 누군가의 자식, 친구, 연인, 성 소수자, 드랙퀸, 끼순이 그리고 미친X…’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그는 털 난 물고기 모어(毛魚)가 자신의 사회적 위치라고 명명한다. 왜냐면 물고기는 털이 나지 않으니까, 털 난 물고기는 어딘가 이질적이고 낯설고 이상한 존재니까, 하고 그는 말한다.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 그는 모어(毛魚) 그 자체였다.

 

영화제가 끝나고 일상에 돌아와서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모지민 배우가 자주 생각났다. 영화제의 첫 관람 작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영화 속 모어의 행보가 예상보다 파격적이라 그랬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의 이유에서였으리라. 그러나 모어를 인상 깊게 본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앞서 나와 같이 영화제나 특별 상영회를 통해 <모어>를 관람한 주변 지인들도 모두 호평 일색의 감상평을 남겼으니 말이다. ‘모어’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강렬한 에너지 같은 것이 분명 존재했다.

 

 

털난물고기모어_표지_띠지유_인쇄용.jpg


 

그래서 책 『털 난 물고기 모어』를 집어 들었다. ‘모지민’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서,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 궁금해서, 또 어떤 식으로 글을 써 내려갔을지 궁금해서. ‘모지민 에세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덥석 책을 신청해 버렸다. 작년 초겨울, 영화로 처음 그를 접한 뒤 반년 만에 책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스크린 속 모어의 모습을 회상하며 책을 펼쳤다. 그는 활자 속에서도 생생히 살아 움직이며 강렬한 색채를 내뿜고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이 글은 모어의 것’임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덕분인지 나는 글자 속에 녹아 들어간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한결 입체적인 시각으로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모어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털 난 물고기 모어』는 영화 <모어>만큼이나 독특하고 기이하며 솔직담백한 면이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이런 에세이는 없었다. 적어도 기존의 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산문과 시, 희곡 등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쓰인 글은 모어가 만들어낸 유일무이한 세계의 영역이었다. 그만의 필터링 없는 문장과 속사포 랩은 나의 웃음 장벽을 또 한 번 무너뜨리고야 말았고. 나긋나긋한 그의 야무진 목소리는 상상 속에서 좋은 독서 친구가 되어주었다.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는 와중에도 뒤 내용이 궁금해지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나는 모어의 세계에 한층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모어의 삶,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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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는 판이하리만치 다른 삶을 살아온 그지만, 이상하게 모어의 글에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이었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좌절하고, 외롭고, 고독하고, 화나고, 수치스럽고, 역겹고···.

 

『털 난 물고기 모어』를 읽으며 유독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태도의 연민과 독백이 눈에 들어왔다. 모어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거칠법한 그 모든 감정의 굴곡을 자신만의 언어로 적확하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잠들기 전 잠시 눈을 뜬 이성이란 자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느라 애썼다며 이 게임의 결말은 피바다라는 결말을 일러주었다. 나 혼자 다 해 처먹는 사랑은 맥없이 종지부를 찍었다. 어이없게 비웃기를 기다리는 비극의 농간이 농후했다. (···) 

 

두 번 다시 걸려오지 않는 전화, 별일 없는 문자, 기약 없는 만남.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삼류 코미디 극장 안은 무심한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했다. _p.65

 

 

그만큼 지리멸렬한 삶을 살아온 거겠지, 하고 생각하니 순식간에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걸어왔을 까마득한 길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어의 글은 마치 절벽 끝에 위태로이 매달린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글에서는 깔깔깔 웃음이 터지다가, 어떤 글에서는 불현듯 사무치게 슬퍼지곤 하는 것이다.

 

 

전화기는 잠을 잔다. 남편은 매번 내 문자에 답변이 늦다. 외롭다. 뒤돌아보면 사람들은 웃고 있고 나의 등은 아리아리 쓰리쓰리. 가도가도 오도가도 갈팡질팡. 나는 언제쯤이면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서 초연해질 수 있을까. 

 

나는 참 못났다. 그토록 서고 싶었던 뉴욕 무대에서도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느낀 건 외로움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풍증처럼 밀려오는 뼈의 시림. 죽음은 가깝고도 멀리 있고 나의 이 모든 불행은 벼슬처럼 이고 사는 연약함에서 비롯되었다. _p.258

 

 

 

'보광동 세련된 아이들'



영화 <모어>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음악이었다. 가수 이랑의 노래였다. 영화 속에서 이랑의 노래는 모어만큼이나 짙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독특한 음색의 노래가 의외로 영화와 완벽한 합일을 이루고 있어서 ‘아니 어디서 이런 찰떡같은 노래를!’을 연신 속으로 외쳤던 기억이 난다.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때로는 사막에 내던져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시나요"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랑의 <신의 노래>는 영화의 주인공인 모어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듯도 했다. 이어진 "어쩌면~ 난 영화를 만드는 일로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몰라"라는 가사를 들으면서는, 어쩌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정말로 신의 놀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랑은 실제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털 난 물고기 모어』를 읽으며 모어와 이랑, 두 사람의 완벽한 조화가 비단 영화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어쩌면 영화에서보다 현실에서, 두 사람은 더욱 단단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며칠 후 이랑의 2집 <신의 놀이>가 발매되었다. 1집 <욘욘슨>은 절판된 지 오래. 앨범은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신곡 중에 ‘평범한 사람’이 가장 크게 와 닿았다. 


왜 누군가는 항상 주목을 받고 왜 내 얘기는 너에게도 들리지 않는지

하다못해 길가에 지나가는 동물도 나보다 더 좋은 걸 걸치고 있는 것 같은데


나: 랑아, 너는 어떻게 이렇게 인생을 알아?

랑: 나는 딱 이만큼만 알아.

 

p.96

 

 

책의 2부에 실려있는 [보광동 세련된 아이들] 장에서 모어는 2014년 처음 이랑을 만나게 된 순간을 서술한다. 뒤이어 모어는 이랑뿐만 아니라 ‘보광동 세련된 아이들’에 속한 다른 일원들을 차례차례 소개한다. [보광동 세련된 아이들]이 특히나 기억에 남는 건, 모어만큼이나 그의 친구들이 아름답고, 빛나고, 유쾌하기 때문이었으리라. 2016년 6월 퀴어 퍼레이드에서 세상 모두를 발라버린 사건부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보그>지에 원고를 싣지 못하게 된 사건, 영하 10도에 북한산에서 실오라기 정도만 간신히 걸치고 촬영을 진행한 사건, 결혼식에서 다 함께 축가를 부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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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의 <웃어, 유머에> 뮤직비디오 속 '보광동 세련된 아이들'

 

 

그중에서도 ‘보광동 세련된 아이들’이 이랑의 뮤직비디오 <웃어, 유머에>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함께 촬영을 진행한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모두가 드래그가 된 날, 식탁에 옹기종이 모여 앉아 화장을 때리고 촬영은 집에서 골목에서 끼스럽게 진행됐다’던 그날의 현장이 궁금해진 나는 곧바로 유튜브에 뮤직비디오를 검색해 찾아보았다. 본문에서 언급된 대로 나는 ‘전 뒤집기 기술을 선보이며 드래그가 전 부치는 희대의 명장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와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순간들! 어느새 ‘보광동 세련된 아이들’에 남모를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어와 이랑을 일찍이 알았더라면 2017년 12월 27일에 열린 이랑 X 모지민 <신의 놀이> 낭독회에도 일찌감치 달려갔으리라. 이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우정이 무척이나 단단하게 느껴져서 해당 장의 끝부분을 읽으면서는 나도 모르게 조금 서글퍼졌다.

 

 


'그런 날도 있는 법'



책 『털 난 물고기 모어』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서사시’ 구간이라 답할 것이다. 2부의 [그런 날도 있는 법 1, 2] 장에서는 장장 535편에 달하는 서사시가 나열되어 있다. 몇 번이나 돌려보고 싶을 정도로 대부분의 시가 주옥같고, 공감되고, 웃기고, 슬프고, 서럽고, 애처롭고, 유쾌하고, 통쾌하다. 그 무수한 서사시를 통해 모어가 겪어온 삶의 비애와 좌절과 슬픔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블랙 코미디식 유머와 자조가 뒤섞인 그의 글은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게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날카로운 문장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82

세상만사에 관심 없는 척

외롭지 않은 척해 보았다

그런 허세도 있는 법


  117

세상 어느 오지를 가도 한국인은 제법 있다

그런 독한 민족도 있는 법


  131

나의 MBTI는 INFJ

성실은 맞고,

독창적 맞고,

계획적 맞고,

예언자?

내 인생을 예언했다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란 법


  443

하나도 안 슬픈데 슬퍼한 적이 간혹 있다

그런 개구라 슬픔도 있어야 하는 법


  464

옛 음악처럼 좋은 건 없다

그런 향수에 젖는 시간은 매일같이 필요한 법


  510

세윤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민아, 너 과테말라 갔을 때 무덤 본 적 있어?

나: 응, 그런데 와이?

세윤: 내가 과테말라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무덤이었거든. 노랗고 파랗고 알록달록 파스텔 톤의 무덤들 세상 아름다웠어

나: 그럼 내가 죽으면 핑크색 무덤에 ‘모지민 개말라 끼순이 잠들다’라고 써줄래?

세윤: 깔깔깔~

누가 먼저 가든 절대! 슬퍼 말고 잘 가라고 웃으며 성스럽게 보내주자

나: 옳아. 웃어 무덤에, 웃어 죽음에.

순간 공포스럽기만 했던 죽음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 무덤을 꿈꾸는 법

 

 

무엇보다 서사시를 읽으며 모어만의 유행어를 배우게 되었다. 니씨염뚜! 세상이 나를 화나게 한다면, “니씨염뚜!”를 소리쳐 외쳐보자. 상황이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뜻을 알고 나면 의외로 속이 시원해지는 단어다.

 

 

 

영화 <모어>의 개봉을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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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전, 영화 <모어>가 2022년 6월에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발레리나, 뮤지컬 배우, 안무가, 작가, 누군가의 자식, 친구, 연인, 성 소수자, 드랙퀸, 끼순이 그리고 미친X…’ 그리고 털 난 물고기 모어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6월 극장가로 달려가길 권한다. 책 『털 난 물고기 모어』를 읽고 간다면 – 사실 읽고 가지 않아도 – 아름다운 모어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삶을 그저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말한다면 결과물은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어디엔가 나는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모어>는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에 출현할지 모르지만 나와 사람들의 눈과 마음속에 무언가를 남겨줄 수 있는 영화가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단단하지 않으면 담길 수 없고 사공에 흔들리지 않기를 그 심지의 불씨가 꺼지지 않기를 마지막에 가장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언제가 될지 모를 그 웃음은 나를 빛나게 완성시킬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중에, 감독에게서 영화 막바지 작업 중이라고 무려 7개월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2021년 9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모어>를 상영한다는 소식이었다. _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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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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