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명]
어떤 대상의 의의나 가치를 다시 들추어 살핌
익숙한 대상과 사건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당연함에 가려졌던 그 가치를 재조명한 작업입니다

무언가를 너무 싫어해도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어떤 대상을 극으로 싫어하는 기운의 가장 끝에 와 있다. 바.퀴.벌.레. 그렇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로 싫어하는 게 뱀도 아니고 쥐도 아닌 바퀴벌레다. 얼마나 걔가 싫으냐면 뱀, 쥐는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다. 바퀴벌레의 바를 타이핑하기만 했을 뿐인데 닭살이 쫙 돋는다.
바퀴 앞에서 나는 세상 쫄보가 된다. 녀석을 마주치는 순간 돌처럼 몸이 굳어 버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어찌저찌 놈을 기절시킨다 해도 끝까지 처리를 하지 못해 매번 진땀을 뺀다. 그렇게 미련하게 새벽까지 바퀴벌레와 대치를 하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신 졸린 아부지를 방으로 모시고 와 최후의 일격을 부탁드린다. 참으로 효녀가 아닐 수 없다.
어렵게 만든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퀴벌레에 집착한지도 벌써 며칠 째. 습해진 여름 날씨에 집안 군데군데서 바퀴가 출몰하고 있다. 화장실과 세탁실에서 연달아 나타난 것도 모자라 새끼 바퀴벌레까지 냉장고 근처를 배회해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애기 혼자서 단독 행동을 하겠냐고! 얘네 벌써 대가족이라고!’
언제까지 이런 원치 않는 만남 앞에서 심장을 부여잡아야 하나 싶어 쫄보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바퀴 퇴치라는 목표를 세웠다. 열두 개짜리 패치형 약을 붙이기 전에 몇몇 바퀴벌레 퇴치 전문 업체 블로그에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기로 했다. 새로운 설치 정보를 습득하던 중 나는 녀석들의 일상적이고 적나라한 행보에 뒷목을 잡고 말았다. 따끈따끈한 온기가 맴도는 자리, 그러니까 밥솥 주변이나 냉장고 뒤편 같은 곳이 바퀴벌레의 최애 장소임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바퀴벌레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더욱 절실해졌다. 징그러워서 싸울 맛은 안 나지만 제일 싫어하는 놈에 대해 속속들이 알기로 했다. 일단 바퀴약 상자에 써 있는 두 개의 단어를 아래의 방식으로 파헤쳐 보았다.
약과 먹이를 섞은 <1.독먹이>를 섭취한 바퀴벌레가 자기 서식지로 다시 돌아간다 - 그곳에는 구토물과 배설물 심지어 자신들의 사체까지도 먹는 잡식성의 동료들이 살고 있다 - 돌아온 바퀴벌레는 장 점막이 손상되어 뭘 먹어도 흡수가 잘 안 된다 - 그러다 영양 부족으로 서서히 죽게 된다 - 동료의 사체를 먹은 바퀴들까지 모두 전멸해 버리는 <2.연쇄 살충>이 일어난다.
전문가의 한 줄 용어로는 ‘독먹이제 방식의 강력한 연쇄 살충 효과’ 되겠다. 덧붙여 프로페셔널한 시선을 빌려 우리집을 진단한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진단 1]
“바퀴벌레들은 이미 선생님 댁에 서식지를 마련했습니다. 주택 특성상 외부 유입도 많았을 거고요. 혹시 현관이랑 신발장 체크해 보셨나요? 최근에 바퀴 여러 마리가 연속해서 나왔다고 하셨고, 큰 놈이랑 작은 놈 둘 다 보셨고요. 번식이 꽤 진행됐을 거예요. 알집까지 더하면 잠정적인 바퀴는 더 많을 거고요. 자주 나타나는 곳을 포인트로 잡으시고 이동 경로를 한번 연결해 보세요.”
[진단2]
“특히 부엌. 얘네가 따뜻하고 습한 걸 좋아해서 부엌에서 잘 나오거든요? 씽크대 하부장 안쪽에도 설치하시고 평소에 물기도 잘 닦아주세요. 쓰레기 같은 것도 빨리 비워주시고요. 열이 나는 가전제품 주변도 체크해주세요. 밥솥이랑 냉장고가 따뜻하니까 그 주변으로 많이 꼬여요. 얘네가 다니는 경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 빨리 잡을 수 있어요. 집안에 전체적으로 약을 설치하면 더 좋고요.”
[진단3]
“바퀴는 완벽하게 박멸할 수가 없어요. 주기적으로 퇴치하면서 신경쓰는 게 가장 좋아요.”
전문가의 진단 1, 2, 3을 다시 내 방식으로 풀면 ‘바퀴는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님. 퇴치에 있어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 정도 되겠다.
안다. 바퀴벌레는 완벽하게 박멸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전문가처럼 바퀴를 제거할 수도 없다. 허나 1분기 동안은 단기 전문가가 될 수 있다. 패치약의 효과는 3개월. 석 달에 한 번씩 약을 교체하고 그것을 일 년에 네 번 경험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전문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서서히 능숙한 면모를 갖추면서 놈들의 허를 찌르고 싶다. ‘미친 거 아니야? 왜 이런 데 붙이고 XX이야!’ 하고 뒤통수칠 수 있게.
과연 바퀴들은 어딘가 허술한 단기 전문가에게 속아 줄까? 분기별로 조금씩 달라지는 인간의 미미한 발전을 알아챌까? 그러다 놈들이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게 되는 날이 올까? 계절마다 뭔가를 더 알아 갈까? 뭐든 지금보다는 나아질까? 이런저런 염원을 담아 패치 약을 꾹꾹 눌러 붙였다.
여름에 약을 설치했으니 3개월 후에 다시 교체해야 한다. 이 말은 곧 쌀쌀한 11월에는 내가 좀 더 프로페셔널해져 있을 거란 얘기다. 속성의 배움이 과연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두고 볼 일이지만 구호를 힘차게 외쳐 본다.
“너네만큼 나도 만만치 않다! 조기 퇴치! 신속 퇴치! 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