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일반인이 영화를 접하는 방식은 영상을 통해서다. 직접 두 발로 영화관에 걸어가 2시간에서 3시간 남짓 집중하거나, 알고리즘을 통해 갑자기 뜬 영화의 짤막한 영상을 접한다.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의 머리로부터 떠오른 상상을 완벽하게 시각화한 것을 만나게 된다. 살을 덧붙이거나 더 채울 필요 없이. 간혹 빈틈이 있거나 발에 걸리는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제작자가 의도한 것일 테니 우리가 할 일은 보기 좋게 흡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영화 한 잔을 마시게 된다. 이게 보통의 우리가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는 어떨까? 감독이나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서사를 바탕으로 대사와 지문을 뼈대 삼아 구축한 시나리오는 영화의 설계도라 볼 수 있다. 집을 짓기 전 대들보같은 역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빈 공간이 많다. 아직 완성도가 채워지기 전 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 말인 즉슨, 최소한의 정보량을 가지고 개개인이 떠올릴 수 있는 상상의 폭이 더욱 커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인물의 대사와 상황에 대한 설명만으로 개개인이 떠올리게 되는 장면은 모두 달라진다. 감독과 같이 이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기분으로 읽을 수도 있다. 만약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했다면, 이 시나리오집은 관객이 독자로 나아가게 하는 연결끈이 된다. 직접 보았던 장면을 활자로 다시 접하며 곱씹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담백하고 깔끔한 문장이 어떻게 실제가 되는지 감상하며 말이다.
나의 경우에는 전자에 가까웠다. 그 말인 즉슨, 영화의 전부를 본 적은 없지만 얼추 내용에 대해서 익히 보고 들은 적이 있었다. 가끔 추천으로 올라오는 짤막한 영상까지도. 그러다 보니 이 작품의 주가 되는 배우들이 어떤 톤과 색깔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알고 있지만, 그 작품의 깊이에 대해서는 헤어리지 못했다. 그런 사람에게 시나리오 집은 빈 장면들을 속속들이 채워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나는 이번 시나리오 집을 그렇게 접했다. 분명 아는 장면이 나올 때에는 매우 반가워 머릿속으로 선명한 장면을 떠올리면서도, 보지 못한 장면에 대해서는 온전히 나의 상상력에 기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흐름으로 시나리오를 읽다보면 유난히 인상깊은 부분이 등장했다. 갑자기 나를 멈춰 세우는 방지턱은 갑자기 다가왔다.
어머니 [점검하러 왔는데 애가 여기를 좋아해서요. (먹을 수도 없는데)]이츠키는 자리에 일어서서 이리저리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오토네 [몇 년 되셨어요? 그러니까 ...... (죽게 된 이후로).]어머니 [2년 됐어요...... 차 사고였는데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요.]자신들의 상황과 비슷하다.오토네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츠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 아주 많았는데... 그걸 하는게 지금 삶의 보람이에요.]이 말과 함께 이츠키에게 웃음을 보이는 어머니.
해당 장면에서는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나에게는 사회적인 시선을 너무나 많이 받은 나머지, 최대한 순진하게 아들의 죽음에 대해 답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이미 익숙해졌을 법한 아픔이지만, 매번 새로운 사람들에게 죽음을 설명하기란 쉽지가 않다. 사람들의 무지하고 천진하며 애달퍼하는 질문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죽은 아들을 대체할 안드로이드와 함께 살게 될 부부의 미래를 그려보이는 이 인물에게서는 다양한 감정이 엿보인다. 사고로 갑자기 잃어버린 아이를 향한 그리움, 그 아이와 똑같은 생김새를 한 로봇을 향한 애틋함, 죽은 아들을 이렇게 대체해도 되는지에 대한 도덕적인 망설임. 그 중에서도 가장 비춰보이는 것은 이미 사라진 아이를 인조적으로라도 되살려 눈 앞에 존재하게끔 만들고 싶은 인간의 욕심이다.
노부요 [뭔 생각으로 저런 걸...]오토네 [(평온한 척을 하며) 지금 전국에 3천 명이나 있대.]노부요 [아직 젊은데 한 명 더 만들면 되지.]...노부요 [(안뜰을 보며) 잘도 만들어졌네...]오토네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노부요 [너무 진짜 같아서 괜히 섬뜩하지 않니?]
오토네의 엄마 노부요는 예상치 못하게 죽은 손자를 쏙 빼닮은 안드로이드 카케루를 만나고 당황해한 것도 잠시,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털어놓아버린다. 말은 곧 비수가 되어 오토네의 가슴에 꽂히게 되고, 계속해서 창과 방패의 싸움이 이어진다.
노부요 [이거 (레몬 나무).]오토네 [으응...]노부요 [베어 버려. 이 나무 말이야.]오토네 [뭐?]노부요 [베어 버리라고.]오토네 [무슨 소리야. 이 나무는...]노부요 [싫어도 날마다 생각날 거 아냐.]오토네 [싫지 않거든.]노부요 [그러고 사니까 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죽음의 대수로움이다. 이미 손자의 죽음을 추모하고 마음 속에서 정리를 끝낸 노부요와 달리 오토네에게는 죽은 아들에 대한 미련이 존재한다. 아직 더 해줄 게 많았는데, 아직 어린 나이인데, 그리고 계속되는 그 날에 대한 후회. 그 후회가 겹겹이 쌓이고 덩어리져 결국 안드로이드를 집에 들이게 되는 상황이 찾아오자 아들의 형상에 대한 오토네의 사랑과 집착은 심해진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서서히 그 그림자를 드리우며 함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죽음에는 올바른 때가 없고, 모든 일은 인과관계를 따져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이미 떠나보낸 자와 떠내 보내지 못한 자 사이의 간극은 가늠할 수도 없이 크다. 전국에 3천명이나 있다며 안드로이드 입양에 대해 대수로운 모습을 보이는 오토네는 아들에게 찾아온 죽음만큼은 결코 대수롭게 넘기지 못한다. 미련이 넘친다. 무엇이라도 붙잡아 빠져나간 빈자리를 채우고자 발버둥치며 그 종점이 바로 아들의 겉모습을 빼닮은 사람 아닌 무언가다. 바로 이것이 대수로움의 모순이다.
오토네 [... 괴로움이나 슬픔 같은 건 없나요?]오사나이 [마음이 없으니까요. 만약 그런 식으로 보였다면 그건 당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새로운 관을 붙이자, 액체가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내장이 움직인다.오토네 [나의 감정...]오사나이 [(눈으로 상처를 보면서) 어차피 이 애는 당신 과거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과거의 카케루와는 다른 행동을 하는 안드로이드를 보며 오토네는 소름끼쳐 하며 진심을 내뱉어 버린다. 그런 짓을 하는 아이는 엄마 애가 아니라는 말에 카케루 안드로이드는 아들의 모습을 보이는 대신 돌연 계약을 종료하겠냐는 말만 종용하며 모자지간의 관계에서 계약자와 피계약자의 관계로 변환한다. 오토네는 결국 혼란에 휩싸이고, 엄마 역할을 그만하겠다는 말을 한다. 그러자 카케루는 윗층에서 떨어져 버리며 스스로를 해하는 행동을 한다. 그를 고치기 위해 방문한 엔지니어 오사나이는 안드로이드의 감정에 대해 묻는 오토네에게 친절한 동시에 냉철하게 답한다. 결국 카케루는 오토네를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 아들에게서 보고 싶었던 모습을 대신해서 얻고자 하는 오토네와 그에 상응하여 반응하는 안드로이드는 결국 인간 사이의 감정 교환이 아닌, 입력과 출력에 제한된다. 그 관계를 알아버린 오토네의 깨우침은 추후 카케루를 놓아주게 되는 시발점으로 작동한다.
상자 속의 양은 죽은 아들을 완벽하게 재현한 안드로이드를 입양한 부부의 이야기를 담는다.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 함께 나누었던 추억의 물건들. 그러나 어떤 기술도 상실의 본질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 죽은 이는 돌아올 수 없다는 잔인한 진실 앞에서, 부부의 눈 앞에 놓인 안드로이드 역시 점차 낯선 기계로 보이기 시작한다.
때로는 화면 속 영상보다 텍스트의 여백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상자 속의 양 역시 그렇다. 담담하고 건조하게 이어지는 시나리오의 문장들 사이로 직접 자신만의 여백을 채워 넣으며, 이 이야기의 결말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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