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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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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홀로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계획하여 예상이 가는 여행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즉흥적으로 움직여 보고 싶었다. 일상에서의 일탈에서조차 시간에 쫓기며 마음을 졸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행에서 꼭 있어야만 할 비행기표와 숙소를 제외하고는 따로 일정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여행 일주일 전, 도서관에서 오키나와 여행과 관련된 책을 빌려 정독하기 시작했다.

 

오키나와의 유명한 곳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만좌모, 국제거리, 평화 기원 공원, 추라우미수족관 등등…. 하지만 그 근처에 있는 맛집이나 카페,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곳, 그 지역만의 문화를 알려면 여러 번의 검색을 거쳐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집중력을 잃고 정보를 위한 여정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유튜브나 네이버, 인스타그램으로 검색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목적을 잊곤 했다. 정보의 바다에서 여기저기 내미는 광고와 영상의 손길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다니다 보면 예상과 달리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정작 얻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인터넷 멀미를 앓는 것이 싫어서 이번에는 책으로 여행을 해보자고 다짐했다. 아날로그로 돌아가 기본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잠시나마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기로 돌아가 혼자 여행하면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 후 여행을 하는 동안 그 책자는 나와 함께 오키나와를 떠돌며 함께 했다. 아침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마지막 날 숙소의 책상에서까지. 처음에는 가방 속 부피를 차지하는 것이 불편했다. 어디를 갈지 정하지 못했을 때 간편하게 스마트폰을 키는 행위를 미뤄두고 뒤적뒤적 책을 찾는 것도 귀찮았다. 하지만 익숙해지면서부터는 정보에 다가서기가 훨씬 쉬워졌다. 관광객만을 위한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맛집을 찾을 확률도 높았다.

 

*

 

첫째 날 저녁. 고생한 만큼 맛있는 것을 먹어보자 싶어 참치를 파는 이자카야에 갔다. 교통편이 좋지 않은 오키나와를 넘본 대가였다. 많은 여행객이 (심지어 책에서도) 렌터카가 있으면 좋다고 권유했으나 청춘의 두 발이면 거뜬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태양은 강렬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자외선이 쏟아졌고, 버스의 배차 간격은 길었다. 지도를 보면서도 길을 잃기가 부지기수였고, 걸음 수는 이만 보를 훌쩍 넘었다. 이자카야는 여행 중 가장 힘든 날에 가려던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즐겨야겠다는 보상 심리가 어느새 가게 앞으로 이끌었고, 곧이어 생맥주와 사시미를 홀린 듯이 시켜버렸다.

 

갈증으로 맥주를 벌컥 들이켜며 종업원에게 오키나와의 명소 중 어떤 곳을 추천하는지 물어보았다. 곧이어 그들 사이의 토론이 이어졌고, 여러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책에서 소개된 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딱 하나 예상과 다른 것이 있었다. 바로 “오키나와 월드”를 가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키나와 월드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민속촌과 박물관, 여러 체험형 공간으로 구성된 테마파크이다. 뱀 박물관이나 전통 무예 공연처럼 보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아 관광객들의 이목을 끄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현지인들은 아무도 가보지 않았다니.

 

반대로 종업원들은 평화 기원 공원을 이야기했다. 책에서도 일부분 언급되었지만, 평화 기원 공원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오키나와에서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곳으로, 조선인들을 위한 위령탑도 세워져 있다. 식사를 마치고 이자카야에서 나온 뒤, 본격적인 고민이 깊어졌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평화 기원 공원을 가야 할지, 아니면 원래 가려고 했던 오키나와 월드에 가야 할지 그날 밤 내내 갈팡질팡했고, 결국 나는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오키나와 월드에 방문하기로 했다.


그렇게 심사숙고 끝에 방문한 오키나와 월드는 우려했던 것처럼 아쉬움이 많이 드는 곳이었다. 민속촌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고, 각종 체험은 모두 유료였으며, 관리가 잘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수많은 종유석으로 채워진 동굴은 볼만했지만 말이다. 오키나와 월드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역시 현지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세계 각국에서 오키나와를 잠시 들렀다 가는 이방인들의 대화 소리를 듣자 문득 내가 지나쳐 온 전통 테마파크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역사적인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얼마나 있을까.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어제 평화 기원 공원을 추천했던 종업원이 여길 온다면 어떤 감상을 남겼을까. 결말을 예상함에도 고집을 부린 것에 약간의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만약 이 시간에 평화 기원 공원에 갔었더라면 보고 느낀 것이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러나 선택은 선택을 낳고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기도 한다. 오키나와 월드에 방문하기 몇 시간 전, 일일 스노쿨링 오전반을 신청해 케라마 제도에 다녀왔었다. 수영은 마스터한 지 오래였지만, 실내에서 하는 것과 바다에서 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파도에 나부끼는 몸을 간신히 튜브에 동여매고 수면 아래를 내려다보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그렇게 바다에 몸을 맡기고 물고기를 구경하는 동안 과테말라에서 온 한 친구를 알게 되었다. ‘타국에서 홀로 오키나와 여행을 하는 여자’라는 공통점이 있던 우리는 금세 원래 알던 사이처럼 친해졌다. 투어의 마지막에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인스타그램을 교환했다. 앞으로 있을 여행의 안녕을 기원하며 헤어지는 발걸음에 약간의 미련이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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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월드에서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식사까지 두어 시간이 남았다. 계획이 없으니 촉박해질 이유도 없다. 이제 뭘 할지 생각하다 보니 전날 종업원이 추천했던 또 다른 명소, "나미노우에 비치"가 떠올랐다. 인공 해변이긴 해도, 도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던 그곳으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번화가 속의 휴양지를 콘셉트와 인위적으로 만든 곳이다 보니 시야에 제한이 있고, 헤엄칠 수 있는 구획은 부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애물의 존재마저도 아름다운 전경을 다 가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음 깊이 안정을 불러왔다. 마침 해가 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니 혼자 여행 온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로 하늘만 멍하니 구경하다 보니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유진!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같이 스노쿨링을 하며 친해졌던 과테말라 친구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반가움의 포옹을 하며 그 몇 시간의 짧은 공백 동안 있었던 근황을 공유하고는, 일몰이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그 짧은 여행 기간에 새롭게 아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무도 모르는 타지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해가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자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 식사의 장소는 역시 오키나와 여행 책자에서 나온 교자 가게였다. 현지 직장인들의 회식 장소이기도 한 로컬 맛집에서 만두를 나눠 먹으며 우리는 이 우연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인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그날 저녁, 머리를 맴돈 한 문장은 우리가 계속해서 외친 “What a small world!”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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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타국에서 첫 홀로서기의 경험은 생각보다 별 게 아니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지금의 현재에 몰두하자 잊혀 있던 감각이 하나둘 깨어났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알지 못했던 것들을 나의 세계로 들여올수록 점점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 같은 하늘 아래 동일한 땅을 딛고 살아가는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음식도 생소하고, 거리의 풍경도 생경하고, 하다못해 좌측통행이라는 사소한 것도 낯설었다. 그러나 이질적으로 보이는 생활 방식에 조금 다가서면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 사람 사는 곳이야’라는 옛말이 있듯이 말이다.


세상은 나의 상상보다도 더 넓다는 것을 깨닫고 보니 근원을 알 수 없는 용기와 희망이 생겨났다. 눈앞의 일이 막막해지고 시야가 좁아져 올 땐 지구 반대편에 위치하는 여러 형태의 세상살이를 떠올리면 된다. 며칠 시간을 내어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고, 마음에 들었다면 아예 거주지를 옮겨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해도 된다. 짧은 시간을 차지했던 여행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 미래에 벌어질 새로운 모험을 불러일으킨다.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나는 또다시 다가올 여정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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