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식탁 위에서 채워 나가는 결핍 - 수박 [드라마/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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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드라마 「수박」의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여름이면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다. 정겨운 매미 소리가 나무를 따라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화창하리만치 강렬한 햇볕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추어 오던 어느 날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은 후각을 매개로 연상되곤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풍겨오던 서점의 시트러스 허브 향. 봄마다 다가오는 노점 좌판대의 딸기 향.
나는 이 드라마를 마주하면 시원하고 달큰한 수박화채가 느껴졌다. 가볍게 머리카락을 살랑이던 바람결을 즐기며 깍둑 썰린 수박을 입안 한가득 채워 넣던 그때를 떠올린다. 딸기 우유를 한껏 머금은 수박은 농축된 자연과 인공적인 향료가 더해져 맛이 배가 되곤 했다. 그런 여름의 향수를 저절로 불러일으키는 드라마 「수박」을 소개한다.
들어서며
「수박」은 2003년 7월 12일부터 9월 20일까지 방영된 일본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방송 이후 제41회 갤럭시상 TV 부문 우수상, 제21회 ATP TV 기자상, 제22회 무코다 구니코상을 받으며 웰메이드 작품으로써의 입지를 견고히 했다. 드라마의 제목과 포스터, 그리고 오프닝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드라마에서는 여름의 상징물 “수박”이 자주 등장한다.
시작은 이러하다. 1983년 어느 여름, 한 하숙집 앞에서 중학교 2학년의 ‘하야카와 모토코’가 수학 시험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한 쌍둥이가 목격한다. 28점이라는 낮은 성적으로 낙담해 있던 그녀에게 쌍둥이는 1999년에 아마겟돈으로 지구가 멸망할 테니 굳이 불태우지 않아도 된다며 위로한다.
20년 후,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다. 34살이 된 하야카와는 ‘신용금고’라는 금융업에 종사하며 여전히 부모의 집에서 거주한다. 그러나 딸을 지나치게 간섭하는 동시에 결혼을 닦달하는 엄마를 피해 홧김에 가출하고 만다. 도피처로 선택한 ‘해피니스 산챠’에서 그녀는 비로소 선택의 방향키를 쥐게 된다. 삼십 대의 중반에 들어설 때까지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하야카와는 당장 무엇이 하고 싶은 건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갑작스러운 독립이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하숙인들과 생활하면서 그녀는 인생을 보는 시각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살아가는 방식은 획일화될 수 없다.
드라마에는 여러 주·조연이 등장한다. 하숙집 ‘해피니스 산챠’를 통해 하야카와 모토코와 얽히는 인물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나 겹치는 구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세상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며,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시바모토 유카’는 해피니스 산챠의 집주인이다. 어린 나이에도 하숙집을 당차게 운영해 가는 그녀는 가업을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 그녀의 엄마는 가정의 책임으로부터 사랑의 도피를 한다. 그래서인지 시바모토는 집주인답지 않게 어른을 대하는 것이 서툴다. 어리숙하고 순진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생각의 골이 깊은 인물이다. 하숙집을 운영하는 데 나름의 책임감도 존재한다. 그녀는 하숙인들을 위해 음식을 요리하고 개발하며, 하숙집을 가꾸어 나가는 것에서 뿌듯함을 얻는다.
그녀는 하야카와의 첫인상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굉장히 정체된 사람이다.” 일반적인 어른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하야카와에게 ‘정체된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는 것은 어떤 역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는 번듯한 일터를 가지는 베테랑 직장인인 동시에 부모에게 종속된 삶을 살아가며 주도적인 결정조차 내리기 힘들어한다. 독립 이후에도 부모가 찾아와 때때로 간섭을 일삼기도 한다. 일찍이 제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시바모토의 시선에서 하야카와는 한곳에 머물러 있는 정반대의 사람일 수밖에 없다.
‘카메야마 키즈나’는 20년 전, 시험지를 불태우는 하야카와를 목격했던 쌍둥이 중 동생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 내성적인 인물이었지만, 현재는 성인 만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간간이 받는 원고료로 겨우 먹고살며, 월세를 밀리기도 수차례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고 스스로 한 결정을 책임지고 싶어 한다. 키즈나의 본가는 꽤 부를 축적한 부유한 집안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버지와 본인을 별개로 생각하며 자신이 일해서 번 돈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키즈나의 쌍둥이 언니는 1999년에 죽었다. 지구의 멸망이자 종말이라고 여기던 99년에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키즈나는 그 이후로 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형이 지나치게 닮아있던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이별을 겪는다. 그 일을 계기로 키즈나는 자아를 찾으려는 여정을 시작한다.
“인간도 말이야. 저런 식으로 안에 있는 걸 전부 뺀 후에 새로운 걸 채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수영장의 물을 교체하는 장면을 본 키즈나는 이렇게 말한다. 잊지 못하는 기억을 질질 끄는 바람에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녀는 언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리고 본인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친다.
‘사키야 나츠코’는 중년의 교수로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이미지로 통하는 그녀는 사실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얼버무리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학생 때부터 쭉 이 하숙집에서 거주해 왔다. 사랑을 좇아 사라진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절망에 빠져있는 어린 시바모토에게 그녀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줄 것을 약속했다. 해피니스 산챠의 하숙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로, 주변에서 길을 잃고 고민할 때마다 현명한 답을 제공한다.
그녀의 단단한 내면은 막 독립을 시작한 하야카와와의 대화에서 돋보인다. 하야카와는 재능과 목적이 있는 하숙인들을 보며 자신과 비교하기를 일삼는다. 34살까지 해야만 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며 나이에 얽매여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자 사키야 교수는 “사람한테 나이란 없는 거예요. 오이디푸스 시기를 넘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죠. 당신은 오늘 오이디푸스 시기를 넘기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거예요.”라고 답한다. 뒤늦은 독립임에도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하야카와는 인생에서의 새로운 출발점을 진심으로 축하받는다.
눈여겨 볼 점
드라마 「수박」은 하숙집 ‘해피니스 산챠’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2003년의 여름이 배경인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옷차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패션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다. 현재 Y2K 복고풍의 옷이 유행하는 것처럼 이들의 패션은 20년이 더 지난 지금의 시선에서 보아도 세련됐다.
그들은 흰 원피스와 청바지를 레이어드해서 입고, 레이스 민소매와 짧은 카디건을 매칭한다. 머리를 질끈 묶기보다 집게 머리핀으로 고정하고, 컬러 핀으로 헤어 스타일을 완성한다. 화려해서 눈이 부시다기 보다는 수수하고 아기자기하다. 계곡에 수박을 담그고, 선풍기 아래에서 맥주를 마시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반가움이 느껴진다.
하숙집에 거주하는 주연 4명은 모두 여성이다. 그들은 그 시대의 여성들이 요구받던 결혼이나 가사 노동, 가정을 위한 봉사에서 벗어나 자신이 주도하는 삶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숙집 주인, 금융업 종사자, 대학 교수, 만화가는 나이와 성장 배경에 상관없이 각자의 삶을 존중하며 공감한다. 인간은 개성을 가진 독립적인 존재이며, 서로의 인생에서 추구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매일 밤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함께 한다. 개인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익명의 시대에서 그들은 밥으로 통한다. 사회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기 바빴던 인물들은 식탁을 통해 삶에서 받아온 상처를 지워나간다. 피를 나누지 않은 가족이 되어 간다. 하숙집 주인인 시바모토는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세상엔 사랑이 가득할지도 몰라요.”
마무리
요즘 들어 내가 느끼는 것은 삶에서 자극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티비를 틀어도, 유튜브를 열어도, OTT를 보아도 서로 죽고 죽이는 이야기가 너무나 당연해졌다. 살생에 부과된 비하인드 스토리 몇 줄짜리에 행위조차 정당화되고 마는 흐름에 환멸을 느낀다. 현실이 가혹해서 대중매체가 물들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대중매체로 인해 현실이 가혹해진 것인지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명확하게 다가오는 것은 삶에서 자극과 단축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이다. 얇고 여린 겹으로 존재하는 감정 표현을 뭉뚱그려 버리는 소위 엠지세대의 용어가 폭주하는 것이 안타깝다. 개인의 상태를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걱정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상매체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자극이 있어야만 팔리는 시대에서 나는 수박화채를 해 먹고 더위에 양산을 펴 들며 실수에 좌절했다가도 금세 극복하는 인간을 보는 것이 좋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가 아닐까. 매미 소리가 사그라들기 전에 여러분이 나와 같은 마음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드라마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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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에서 사키야 교수는 오랫동안 해왔던 대학 교수직을 그만둔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나폴리로 떠난다. 사람은 어디서든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겪어보려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꽃길을 걷는 데 휘청거리면 안 되지, 똑바로 걸어 나가야지!”
[조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오늘도 잘 봤습니다! 공감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