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밖에서 도달한 공감 : 연대의 부재가 그린 '돌봄'의 늪

처음 연극 <또 여기인가>를 보면서 느낀 것은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인 것 같으면서도 또 아닌 것 같은,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었다.
기존의 법이나 도덕이 만든 선을 넘나들며 그 틈새의 ‘인간’과 ‘마음’을 비추는 이야기, 어딘가 뒤틀리고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기에는 뭔가 부족할 것 같은 인물들, 그들이 겪는 지독한 고독과 다양한 상징들.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들이 가진 여러 특징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동안 보았던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들에는 있는 중요한 것이 이 극에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대’ 였다.
사카모토 유지 작품들 속 인물들이 마주한 현실은 대부분 녹록지 않지만, 그 고독과 절망 속에서도 끝내 서로를 알아보고 연대한다. 물론 각기 다른 결말 속에서 연대가 끊어지기도 하지만, 연대의 경험을 통해 성장한 인물들은 어떤 방향으로든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연대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 지카스기가 주유소 직원 다카라이 앞에서 계속 혼잣말을 이어가는 듯한 첫 장면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계속되는 느낌이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움직이지만, 대화는 겉돌 뿐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들은 지카스기가 겪었던 고독과, 아버지의 병수발을 혼자 감당하며 철저히 고립된 그의 전사를 떠올리게 한다. 제대로 대화 한 번 하지 못한 이복형에게 지푸라기 잡듯 계속 편지를 보내야 했을 만큼, 도와줄 사람 없이 홀로 아픈 아버지를 돌봐온 지카스기의 삶은 마치 ‘늪’처럼 느껴진다.
‘돌봄’은 그동안 사카모토 유지 작가의 작품들에 여러 번 등장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돌봄의 사각지대에서 더욱 취약해지는 인물들과, 제도의 제대로된 도움을 받지 못하고 가족이라는 관계가 만들어낸 책임 속에 홀로 돌봄을 감당해야 했던 다양한 인물들의 군상이 그의 작품들 속에 여러 번 등장한다.
개인의 영역 혹은 가족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제도의 범주 밖으로 미뤄지는 돌봄의 책임은, 때로 너무나 무겁게 개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그것을 감당할수록 더 철저한 고립과 무력함으로 사람을 몰아 넣는다. 어쩌면 결국 주변 인물들의 노력으로는 구원될 수 없었던 지카스기의 고독과 고립은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러한 현실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봄은 다양한 층위와 관계 속에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에게도 각기 다른 무게와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봄이 가진 가치나 노동으로서의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롯이 돌봄을 개인의 몫으로만 미뤄둘 수도 없다.
공동체의 중요한 기능으로서도, 가시화되지 못한 노동으로서도, ‘인간적인’ 삶을 위한 것으로서도, 다양한 위치와 관계에서 수행되는 돌봄은 공론장 안에서 조금 더 선명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돌봄이 당사자를 포함한 개인의 책임이나 개인들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의무로만 다루어진다면, 돌봄은 너무 쉽게 개인을 소진시키며 착취의 그림자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극 중 지카스기 역시 돌봄의 늪에서 더욱 고립되고 망가졌으며,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극의 제목처럼 아무리 발버둥치고 희망을 품어봐도 지카스키의 삶은 결국 또 ‘여기’였다.
물론 지카스기가 짊어져야 했던 삶이 그의 모든 행동에 면죄부가 되어줄 수는 없고, 다른 인물들이 그랬듯 관객인 우리도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극은 이해 너머의 또 다른 방식으로 지카스기를 우리 앞에 소환한다.
이는 다카라이가 말했듯 ‘기린이 왜 목이 긴지, 얼룩말이 왜 무늬가 있는지 묻지 않는’ 것과도 닿아 있다. 이해의 범주에 굳이 지카스기를 넣으려 노력하기보다 그 자체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상황 속에 덮쳐오는 무기력함과 막막함, 그 속에서 어딘가 망가져 버린 듯한 감각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이렇게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끌어 올린 날것의 감각과 감정들을 이해의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피부로 와닿게 만드는 것이 사카모토 유지 작가가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해 밖에서 공감에 도달하게 하는 이러한 방식은 가치판단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하지만, 때로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대할 때 필요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너무나 다른 위치와 상황에 놓인 누군가를 어떻게 들여다 보아야 할지 알려주는 힌트가 되어주기도 한다.
네모리 역시 관객과 함께 이러한 공감의 영역에 도달하는 인물이다. 돈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던 그는 지카스기를 이용하려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원하든 원치 않았듯 짊어지게 된 관계와 책임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마주하게 된다.
지카스기에게 닿은 네모리의 늦은 공감이 지카스기의 삶과 앞으로의 선택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해의 영역 밖에서 도달한 공감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해 매번 삶을 망치고야 말았던 그 선택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꿔놓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또 여기인가’라며 혼잣말을 내뱉게 되는 삶의 모퉁이 앞에서, 가끔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는 공감과 희망이 상황을 바꾸는 힘으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돌고, 돌고, 돌고, 또 돌아 결국 다시 ‘여기’로 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