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에게 여름 휴가는 삶을 회복하는 중요한 기간이다. 프랑스어 ‘Vacances(바캉스)’는 라틴어 ‘Vacare(비우다)’에서 유래했다. 매년 7월에서 8월 사이, 프랑스인들은 3주~4주가량의 휴가를 떠나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난다.
휴양지에서는 평소 묻어두었던 욕망이나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에릭 로메르 영화 속 인물들 역시 바캉스를 떠나 우연히 사랑을 찾게 된다. 휴양지에서 시작된 사랑이라면 강렬한 감정과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보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에릭 로메르는 흔히 연애를 다루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영화를 각 인물들의 자기 인식과 성장 서사로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1980년대 제작된 에릭 로메르의 6편의 연작 시리즈 <희극과 격언> 중 3편을 다룰 예정이다.
희극과 격언 시리즈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격언이 한 줄 등장한다. 얼핏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교훈처럼 보이지만,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그의 인물들은 저마다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단 한 줄의 문장만으로 삶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인물들은 각자의 믿음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사랑을 찾아 움직인다. 그 속에는 개인의 구체성이 있다.
1.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1987)
내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다
친구의 애인을 사랑해본 적이 있을까. 여러 텍스트에서 고전적으로 쓰이는 소재지만, 각 텍스트가 표현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사회적 관계는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떠한 윤리와 규범은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언제든지 시간이 지나면 변화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감정은 이러한 개념에 취약하다.
블랑쉬는 좀처럼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다. 친구 레아의 오랜 남자친구인 파비앙과 거리를 두려 하고, 레아의 소개로 만난 알렉상드르를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만, 그 관계에서 편안함을 얻지 못한다.
레아가 휴가로 자리를 비운 중에 취향과 대화 방식이 비슷한 파비앙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마침 레아와 파비앙 역시 이미 서로에게 권태를 느끼고 있었고, 레아는 블랑쉬를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알렉상드르와 대화를 나누며 파비앙과 다르게 깊은 친밀감을 느낀다.
인물들이 사회적 규범이나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을 때, 비로소 각자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2. 해변의 폴린 (1983)
과도한 언행은 화를 부른다
폴린은 사촌언니 마리옹과 함께 바캉스를 떠난다. 해변에서 만난 어른들은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진정한 사랑, 육체적 사랑, 운명적 사랑... 하지만 어떠한 사랑의 형태도 진실하게 보이지 않는다.
말이 많아질수록 진실에서 멀어지는 듯하다. 자신의 사랑을 설명하는 말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말이 아닌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 된다. 번지르르한 말과 모호한 행동을 주고 받으며 그들은 상대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지도 못한다.
반면 폴린은 상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사랑은 추상적일수록 진실함을 잃어간다.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단순하게 다가갈 때, 진정한 사랑이 보인다.
3. 녹색광선 (1986)
오! 시간이 되니 심장이 뛰는구나!
랭보의 문장은 사랑이 어떤 운명적 순간에 찾아온다는 낭만적 기대를 품고 있다.
델핀 역시 그런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델핀에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델핀은 그 조언을 따라본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새로운 장소로 떠나고, 자신을 바꾸려 노력한다. 하지만 타인과 가까워지려 할수록 오히려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소외감만 강해진다.
모든 기대를 내려놓은 순간, 델핀은 기차역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마치 델핀이 찾아 헤매던 사람처럼,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이다. 델핀은 수평선 위의 녹색 광선을 바라보며 마침내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은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다. 에릭 로메르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희미한 확신을 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반응하는 사랑의 형태가 있지만,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흔들리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과 신념을 기준으로 조언을 건넨다. 그 조언을 따르려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자신과 세계 사이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겨 행동하자, 그들은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랑의 형태를 손에 쥐게 된다.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믿음의 실체에 대한 희미한 자각에 다다른다.
이 과정은 어떤 극적인 사건, 배경 혹은 이미지가 아닌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진행된다. 대화 자체가 하나의 사건처럼 이어져 인물들은 대화와 만남과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탐색한다.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의 블랑쉬도, <해변의 폴린>의 폴린도, <녹색 광선>의 델핀도 자기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수많은 혼란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지켜냈기 때문에 아름답다. 스스로의 감각을 끝까지 믿어보려는 인간의 모습 자체에 대한 낭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