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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대체 불가능한 구멍들의 윤곽 [도서/문학]

관광객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의 '우연의 아이'가 간과한 상실의 무게에 대하여

by 서지민 에디터
2026.05.24 12:48

 

 

나는 이 나일 수밖에 없고, 쥬치카는 저 쥬치카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 상처는 결코 미래의 나와 다른 개의 구원을 통해 아물지 않는다.

 

- 『관광객의 철학』,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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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은 정치철학에 관한 책 같아 보인다.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이 동시에 득세하는 세계에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관광객이라는 존재가 오히려 분열된 세계를 연결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 갈 필요 없는 곳에 가고, 볼 필요 없는 사람을 만나는 관광객의 우연적인 이동이 타자와의 연결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타자를 소중히 하자는 말에 이미 지쳐버린 시대에, 그 당위를 걷어내고 우연이라는 더 모호하고 가벼운 곳에서 시작해보자는 제안처럼 읽히기도 한다. 읽다 보면 이 책이 정치의 언어를 빌려 사실은 더 오래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인간은 어떻게 서로에게 닿는가. 그리고 닿은 것을 잃었을 때, 무엇이 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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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2부는 가족의 철학으로 넘어간다.

 

아즈마는 여기서 ‘우연의 아이’라는 개념을 꺼내어, 우연에서 출발해 필연에 도달하는 인간의 모순성을 짚어낸다. 태어난 장소도, 만나는 사람도 처음에는 전부 우연이지만 그것들이 엉키며 비로소 나라는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 우연을 의식적으로 기획해 스스로를 둘러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낳고 새로운 우연의 관계망 속으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허무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는 논지다.

 

그러나 상실을 허무주의의 문제로 규정하고, 이를 새로운 우연의 도입으로 갱신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우연에서 출발하여 각자의 필연으로 발현된 존재들은 서로의 삶에 깊이 개입하고, 그러다 서로를 잃는다. 우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결국 남는 건 구멍이다. 그 구멍을 정확히 채울 모양을 가진 건 떠난 존재뿐이다.

 

쥬치카가 쥬치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쥬치카의 자리는 쥬치카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게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존재가 삶에 가지는 무게라고 생각한다. 상실이 상실로서 작용하는 건 그 존재가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체 불가능함이야말로 그 존재가 내 삶에 실재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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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을 해결의 문제로 보면, 구멍을 메우는 것이 목표가 된다. 아즈마의 논리도 결국 그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읽힌다. 새로운 우연을 만들어 둘러싸이면 허무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상실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빈 자리를 빈 자리로 두는 것. 그 모양을 지우지 않는 것. 그게 떠난 존재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새로운 존재를 위해서는 새로운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만으로 또다른 상실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다.

 

이것이 아즈마가 말하는 우연의 아이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결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접근하는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연의 아이를 만드는 일도 결국 상실의 극복이 아니라, 또 다른 우연에서 출발한 새로운 필연의 시작일 뿐이다. 부모가 된다고 해서 그 아이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연의 아이 역시 필연으로 이어지다 결국 상실되는 존재다. 아이를 우연으로만 바라보는 순간, 아이는 더 이상 존재가 아니라 우연성을 겪기 위한 도구가 된다.

 

우연과 필연을 모두 가진 모순적인 하나의 존재를, 상실 이후를 견디기 위한 다음 세대로 보는 건 어딘가 틀렸다. 아이가 우연으로 왔다고 해서, 그 아이를 우연의 기능으로만 쓸 수는 없다. 상실을 상실로 두는 것. 구멍을 구멍으로 두는 것. 그것이 존재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구멍의 모양이 곧 떠난 존재가 내 삶에 남긴 윤곽이고, 그것만이 온전히 내 것으로 남는다. 억지로 채우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모양이 선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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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구멍을 바라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구멍이 생긴 자리는 결국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된 애정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우고 싶은 마음과 지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온다. 그 자리가 아팠던 만큼 소중했고, 소중했던 만큼 아프다. 잊으면 배신인 것 같고, 기억하면 버티기 힘들다. 그 충돌이 상실을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단번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 돌아오는 것. 그래서 잊은 줄 알았다가도 다시 구멍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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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새로운 존재를 삶에 들이는 일은, 그 고통을 알면서도 또 다른 벌어짐을 감수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그 자리가 비워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럼에도 새로운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기로 하는 것. 그게 상실의 극복이 아니라,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가깝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삶은 계속 우연을 빙자해 무언가를 들여보낸다. 필연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온다. 새로운 우연이 쌓여 또 다른 필연이 된다. 그것은 떠난 존재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구멍은 구멍으로 있고, 새로운 것은 새로운 자리에 놓인다. 대체할 수 없음과, 또 다르게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내 삶에 동시에 존재하는 일. 빈 자리의 무게를 알기 때문에, 새로 생긴 자리의 무게도 알게 되는 것. 상실을 겪은 사람이 새로운 존재를 더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구멍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자리가 얼마나 다른 모양일지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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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를 빈 자리로 두는 것이 고립이나 정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구멍은 내 안에 있고, 삶은 바깥에서 계속 온다. 그 둘이 서로를 지우지 않으면서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구멍은 구멍으로, 우연은 우연으로,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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