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생이란 정체성을 품고 산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돌연 일꾼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동안은 내가 ‘잘’하면 되는 주요 역량이라곤 공부뿐이었다. 수업 시간이 되면 앉아서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시간에 내고, 시험을 치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기업에서 노동하는 사람이 되니 지금껏 학생으로서 경험한 것들과는 성격이 다른 일들에서 제 몫을 잘 해내야 했다.
일 경험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엑셀을 포함한 전반적인 컴퓨터 능력을 사무 차원에서 다시 다져야 하는 건 차치하고, 기안을 상신할 때, 공문을 발송할 때, 회의할 때, 협업 시 콜라보 툴을 사용할 때 등등의 상황에서 상대의 가독성을 고려하며 업무를 ‘잘’ 처리하려면 새로운 노력이 필요했다. 잠깐 틈이라도 생기면 엑셀 수식을 하나라도 더 찾아보며 다른 방식의 공부를 시작했다.
또 하나 낯선 것은 수직 관계에서 오는 위계질서였다. 이제까지 직급 간 차이가 크지 않은 곳에서 일해왔다. 거의 같은 동료 사이로 지낼 수 있는 환경이었고, 나이와 관계없이 상호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명확한 직책으로 나뉘는 기업에선 사람은 명패에 가려지는 것 같았다. 상급자의 지시가 곧 진리이고, 상급자에겐 말과 행동 모두를 사뿐사뿐 조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아직도 사람이면 다 같은, 한낱 평등한 인간 개체로 인식하는 내 눈동자로선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물론 연차에서 다져진 혜안이 탁월한 건 맞지만, 왠지 투명하지만 실체는 있는 어떤 비가시적인 카스트 제도 같은 게 감지되는 것 같았다.
곧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은 상사와 대화할 때 지켜야 하는 매너, 엘리베이터와 차에서의 상석, 상급자 자리 뒤로 걸어가면 안 되는 이유, 회사 동료에게 사생활 묻지 않기, 특정 유형의 상사 대처법 등의 회사 생활 콘텐츠로 점령되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직장인들은 모두 어른 같고, 어떻게 다들 알아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런 것들을 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시무룩해졌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와 아래 광고를 보았다. 아이의 모습을 한 노동자의 하루를 담은 영상 광고다.
아침엔 또 지각할 뻔하고, 이런저런 업무는 어떻게 하는지 도통 모르겠고, 게임이나 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니 하는 수 없이 참고, 회의 내용도 KPI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옆 사람에게 물어본다.
속으론 엄마가 ‘보고파’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에선 ‘보고파일’을 완료한다. 발표 ‘하기’가 떨리지만 ‘하기’ 내용 숙지를 부탁한다고 말해야 한다. 힘‘들어’란 말이 절로 나오지만 ‘들어’오세요를 외쳐야 한다. 다시 어른의 겉모습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지만 광고가 끝날 때쯤 우리는 안다. 속은 어린이란 걸.
이제 보니 노동자들 속이 다 똑같겠거니 한다. 사회에선 척척박사 전문가 같지만 속은 다 서투르고 여릴 테다. 집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 하나 없을 것이고, 걱정 없는 사람,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하나 없을 것이다. 모르는 건 당연히 있을 것이고, 발표는 다 떨리지 않겠나. 그래도 겉모습이 훌쩍 커버렸으니 그 속의 어린이를 숨겨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며 일인 분을 하겠지 싶다. 다 어른 안에 아이 있는 어른이 같다.
이렇게 안에 들어있을 어린이의 모습을 생각하면 노동자 하나하나가 애틋하고, 가엾고, 기특하다. 그러니 기계도 NPC도 아닌 이 모든 노동자들과 그들이 하는 노동은 종류와 관계없이 귀하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 같다.
오늘도 사회에서 꾹 참고 멋지게 본인의 몫을 완수하는 어른이들에게 응원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