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나의 모든 선택을 후회해왔다. 작게는 어릴 때 그 친구들과 어울린 것부터 크게는 대입 방식까지. 고등학교 3학년, 진로를 억지로라도 만들어 지원할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고 원서를 접수해야 했던 그 순간부터 인생의 모든 경로 이탈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성인이 된 후론 사소한 선택 하나하나가 나비효과가 되어 내 삶의 방향 전체를 흔들게 된단 생각에 더욱 모든 결정에 주춤하곤 했다. 분명한 목적지를 놔두고 계속해 우회 길로 빠지는 듯한 느낌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고, 가끔은 눈앞에서 길이 뚝 끊긴 것처럼 보였다. 다른 경로를 찾겠답시고 꾸역꾸역 비좁은 문을 뚫어 대학을 바꿨지만, 괜히 인생의 속도를 늦추기만 한 선택은 아니었는지 늘 의심했다.
스무 살부터 내 인생 전부는 뒤틀렸다고 생각하며, 그간 택했던 모든 것들과 남겨진 선택지들을 곱씹어 보았다. 선택에 대한 후회는 자연히 달랐을 수도 있는 세계에 대한 상상을 동반한다. 그때 그 학과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다른 방식을 택했더라면, 그때 과감히 도전했더라면, 그때 조금 더 성실했더라면, 그때 한 번 더 생각했더라면... 수없이 펼쳐지는 더 나은 세계들 속에서 지금 내 세계는 말 그대로 최악의 버전인 듯하다.
이런 후회와 자책이 깊어질 때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몇 번이고 다시 본다. 이 영화는 ‘Be kind’라는 간단한 명령문 하나로 추동하는 다정한 가족 영화로 읽히기도, B급 코미디와 여러 레퍼런스로 구현한 재미있는 sf 영화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 선택과 후회를 거듭하며 삶을 헤쳐나가는 에블린의 모습에 더 마음이 쓰인다. 내 모습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홍콩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다. 웨이먼드의 청혼을 받아들인 에블린은 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코인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외동딸 조이가 태어나며 삶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으나,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조이는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여자 친구 베키를 소개하며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했다. 에블린은 자신은 열린 엄마라며 베키를 포용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말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에블린은 아버지까지 모시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에블린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그녀가 딸이라는 이유로 실망했고, 자신의 엄중한 잣대로 에블린을 압박했던 그 아버지 말이다. 요새 골머리를 앓고 있는 세무 조사를 위해 영수증 더미를 정리하며 가뜩이나 바쁜데, 아래층 세탁소에선 자잘한 문제들이 벌어지고 웨이먼드와의 관계도, 조이와의 관계도 자꾸만 틀어지며 자신의 삶이 최악으로 치닫는다고 느낀다.
Everything
남편 웨이먼드, 아버지와 함께 국세청으로 함께 간 에블린은 그곳에서 웨이먼드의 돌발 지시로 다중 우주의 존재를 알게 된다.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우주의 알파 웨이먼드가 에블린의 귀에 장치를 끼우고, 스마트폰으로 웬 프로그램을 작동시키자 이제까지 지나온 에블린의 일생이 눈앞에 플래시백처럼 스친다. 이후 에블린은 세무 조사 도중 지시대로 행동하다가 평행 우주로 연결되는 혼란스러운 경험을 한다. 알파 웨이먼드는 다중 우주의 위험과 범우주적 악당 ‘조부 투파키’라는 존재에 대해 알려주고, 에블린이 이를 막을 유일한 인물이라고 강조하며 버스 점프 방법을 가르쳐준다. 조부 투파키는 극한의 버스 점프 실험으로 모든 우주의 모든 것을 경험해 허무주의적 괴물이 되어버린 변주 판의 조이인데, 모든 우주의 에블린을 찾아다니며 죽이고 있었고 끝내 현재 우주의 에블린에게까지 도달한 것이다.
한편 현실에서는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의 압박 속에서 상황이 악화되고, 오해와 충돌 끝에 디어드리가 경비원을 부른다. 모든 평행 우주의 인물들과 현재 우주의 인물들이 뒤엉켜 서로를 잡기 위해 사투를 벌이느라 난장판이 된 와중, 에블린은 자신의 삶이 될 수도 있었던 여러 우주를 목격한다. 젊은 시절, 아버지와 갈라서면서까지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오지 않았더라면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았을지를 또 다른 우주에서 보았다. 그곳에서 에블린은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배우가 되어있었다. 웨이먼드 없는 삶이 근사하다고 느낀다. 조부를 상대하던 에블린은 인류의 손이 소시지인 우주와 모든 것을 빨아들여 무의 상태로 만드는 허무주의 블랙홀인 베이글도 마주친다.
Everywhere
정신을 잃고 여러 우주를 떠돌던 에블린은 조부와 대화를 나눈다. 조부는 다중 우주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허무주의를 깨달아버린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베이글을 만들었으며, 이를 이해해 주고 모든 것을 함께 끝내버릴 에블린을 찾아다녔다고 고백한다. 지친 에블린은 이에 설득당해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자신이 배우가 된 우주의 웨이먼드에게 매정한 말을 하는 등 모든 우주의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조부와 함께 파멸의 길을 택하려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념하기 직전 에블린은 현재 우주의 갈림길에서 웨이먼드가 알파 아버지와 알파 점퍼들에게 다정함이 자신의 투쟁 방식이며, 혼란스러울수록 친절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모습을 본다. 배우 우주의 웨이먼드 역시 에블린에게 "다른 삶에서는 당신과 빨래방도 하고, 세금도 내면서 살고 싶다"는 진심을 전한다. 그와의 사소하지만 다정했던 추억들을 되돌아본 에블린은 비로소 무엇이 중요했는지 깨닫고, 정신이 바짝 든다.
궁극적으로 베이글 속으로 뛰어들려던 조이에게 에블린은 “찰나의 순간들을 소중히 여길” 것이라며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해도, 어디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진심을 전한다. 그리고 조이와 진정으로 화해한다.
All at Once
신년 파티를 비롯해 모든 사건이 정리된 후, 에블린은 또다시 세무 조사를 받으러 국세청에 간다. 에블린은 이제 다정해진 다중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체험하듯 멍하니 웃는 표정을 짓는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면 더 나은 우주에 살았을 텐데. 왜 그때 웨이먼드를 따라갔을까, 왜 영수증을 왼쪽에 놓았을까 등의 후회를 하며 지내온 날들이 있었다. 작은 선택 하나로 갈라진 우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쩔 땐 최악의 선택만을 기가 막히게 골라 온 나 자신이 너무도 허무해 베이글에 빨려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차라리 굴러떨어지는 돌로 태어난 우주가 나았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상황에 에블린이 택한 것은 ‘모든 것’이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충실하기다. 그 숱한 선택들이 쌓여 지금의 에블린을 만들었고, 그녀가 온전치 못하다고 생각한 그 인생이 역설적으로 모든 우주가 될 가능성을 내포했기 때문이다. 또 이탈된 경로라고 생각했던 길 위엔 잊고 지냈던, 실없이 웃음 나는 추억들이 있었다.
앞으로 에블린과 내게 남은 선택은 이곳에서 찰나를 소중히 여기며 다정함으로 무장한 채 살아가기인 것 같다. 최악이라고 여겼던 선택들이 만들어온 지금의 인생엔 최선의 결과가 될 수 있는 무한한 갈림길들이, 그리고 그 옆엔 그 모든 과정을 버티게 해줄 사소한 다정함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