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열무의 이름은 열무 [문화 전반]

여물지 않은 무와 덜 여문 인간, 어린이
글 입력 2022.07.1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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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의 이름을 생각하다


 

많은 집이 으레 그렇듯 우리집도 초여름이 되면 상반기 숙제처럼 열무김치를 담근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우리집도 열무김치 TF를 신속하게 꾸렸고, 나는 열무 세척을 담당했다.

 

특별히 차를 몰고 시장에 가서 초여름의 푸성귀, 열무를 한 아름 사다가 싱크대 앞에 섰다. 느리고 꾸준하게 열무를 씻으며 '살면서 열무를 이렇게 자세히 관찰할 일이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유심히 열무를 뜯어봤다. 검지 정도 길이의 무가 달려있고 푸릇푸릇한 무청이 갈퀴처럼 돋아있었다.

 

무청에 무가 겨우 달려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원래 알던 무의 모습과는 현저하게 달랐다. 열무를 보며 무심하게도 판단했다. 열무의 '열'은 '열등하다'의 열(劣, 못할 열) 인가 보다. 상품이 될 수 없는 작은 무는 크게 쓰임새가 없다며 그 무용함을 동정하며 열무를 씻었다.

 

뻐득해진 손을 닦고 일을 하다 문득 열무의 어원이 궁금해졌다. 내가 예측한 것처럼 정말 열등한 무일까? 검색 결과를 보고 한동안 멍하게 화면만 쳐다봤다. 사무치는 반성에 발끝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을 내쉬었다.

 

 

 

덜 자란 게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열무는 열등한 무가 아니라 '여린 무(그러니까 어린, 덜 자란 무)'였다. 나는 왜 덜 자란 것을 당연히 열등하다 생각했을까 작은 것을 왜 모자란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여물지 못한 것들에 대한 포용을 항상 되새기며 사는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마음이 불쑥 차가운 싱크대 속 열무가 되어 나를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가 여린 것들을 포용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나의 포용은 요즘의 주입식 포용성이 아니라 기다려주는 방식이었으면 한다. 기다려'준다'라는 말도 어쨌든 시혜적인 시선에서 출발한 단어이지만 마땅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여물지 못한 사람을 기다려주면서 함께 여물어가는 마음이 나에게 있었으면 한다.

 

어린 이들을 희화화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데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한다.

 

 


어린이의 속성을 다시 생각하다


 

배척하고 프레임을 씌우는 단어를 떠올리면 뿌연 마음이 든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성인을 '-린이'라는 말로 희화화(사실 그들은 '미숙하지만 조금 귀여운 나'라는 미화에 중점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하는 걸 너무 쉽게 접한다.

 

헬린이(헬스+어린이), 주린이(주식+어린이), 등린이(등산+어린이), 식린이(식물+어린이) 등 얼핏 살펴본 기사에서도 이렇게 많은 '-린이'가 등장했다. 유행어가 휩쓸고 지난 자리에는 호칭이 빼앗겨버린 진짜 어린이만 남는다. 문제의식 없이 소비되는 유행어에, 엄연히 사회를 구성하는 어린이는 반쪽짜리 구성원으로써 귀엽고 말을 잘 듣는 것 이외의 기능을 담당하지 못할 것을 강요받는다.

 

어린이의 대상화 역사를 떠올리면 (구) 어린이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든다.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라며 한참을 치켜세우고 부담을 주더니 부쩍 요즘은 노키즈존, 민식이, 잼민이, -린이로 '나이가 들지 않은' 속성을 부각시킨다.

 

그들은 나라의 미래도 아니고 민폐 덩어리도 아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일 뿐, 지나치게 긍정적이거나 지나치게 부정적인 존재로 세상에 비칠 필요가 전혀 없다(집요하게 찾아보면 거의 모든 집단이 지나치게 긍정적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만 굳이 찾아보지 않는 것처럼).

 

국제 아동인권센터도 '-린이'라는 단어에 대해 지적했다. 발화자가 비하하는 의도에서 해당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무의식이 우리 사회에 침투해, 덜 자란 사람을 열등하고 미숙한 존재로 치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다. 여리고 덜 자라, 차마 완전히 여물지 못한 사람의 아물지 못한 마음을 생각한다. 미성숙을 성숙으로 가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 보편이 되었으면 한다.

 

언어유희를 위해 상처 주지 않는 트렌드를 지향한다.

 
 
[오영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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