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인지, 나에게도 누군가에게 구원받고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흔히 등장하지 않는가. 믿을 곳 하나 없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며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정상에 오르는 이야기.
줄곧 빠져나오기 힘든 어둠 속에서 지내오며, 이곳에서 누군가는 날 끌어올려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를 믿고 기다리고 또 진심을 다해 대한다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도.
물론 여기에서 구원은 신학적인 구원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인간을 바뀌게 하려는 의지다. 그게 타인이든, 나 자신이든. 이러한 현상이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만든 심리학 용어로 당당히 존재한다. 바로 ‘구원 환상’.
이러한 용어의 경우에는 구원받는 것보다도, 내가 타인을 구원하고 싶어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듯싶다. 떠올려보자면, 이전의 나는 타인을 구원한다는 생각으로 내가 구원받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그 둘의 선후관계가 어찌 되었든, 구원 환상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바로 구원은 셀프라는 말을. 그래. 사실상 타인으로부터의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망은 금물이다. 구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셀프 구원. 오로지 자기 자신의 구원만이 오롯이 나를 살릴 수 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속담, 그리고 서구권에서 밈으로 사용되는 ‘I can fix him/her(내가 그 사람을 고쳐 쓸 수 있어)’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속담으로, 특히 결혼과 관련해서 자주 쓰인다.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설화 속에서는 평강 공주의 내조로 바보 온달이 장수가 될 수 있을지언정,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I can fix him/her
‘내가 그를 고쳐서 사람으로 만들어 놓겠다’라고 이해하면 쉽다. 밈으로 사용될 때는 외적으로는 아름다우나, 내면이 망가진 사람에게 자주 붙는 문장이다. 나라면 상대를 고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fix, 즉 ‘고치다’라는 동사가 서구권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기계도 아니고 인간을, 사람을 고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싶은데 이게 범지구적으로 통하는 말이라는 것이.
‘내가’ 누군가를 고친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선택이지 나의 영향이 아니다. 그래서 변치 않는 사람은 또 평생 그대로인 것이다. 본인이 직접 자신을 고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뭐가 바뀌든 하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 넣는다 한들 어떻게 하리.
그래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관망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나 역시 언제나 객관적이려고 노력한다. 지금 내가 ‘고쳐야’ 마땅한 상태인 건지, 그리고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그것이야말로 셀프 구원이니까.
인간은 어떻게든 혼자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어야 타인과도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는 법이다. 나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가족으로, 친구로, 연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며 평생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우리 모두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혹시나 누군가에게 구원받는대도, 그걸로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엔딩 따윈 없다. 마왕을 무찌르고, 천마를 죽이고, 결혼하면 끝나는 소설과 다르게 현실에서는 어느 한 시기를 거친다고 인생의 서사가 마무리되는 게 아니다. 고난과 역경을 뚫고 정상에 오른다 해서, 그 이후에는 고난과 역경이 전부 사라질까?
반대로 생각하자면, 현실에는 완벽한 새드 엔딩도 없다는 점이 좋다. 어떤 슬프고 힘든 일이 나를 괴롭게 하더라도, 그건 엔딩이 아니라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정말로 끝나기 전까지는, 인생의 엔딩이 나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행복하고 아름답게 끝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리고 그건 자기 생각에 달렸다.
그렇게 스스로의 손을 잡고, 어둠 속에서 한 걸음 걸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