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대부분의 시련은 사람을 녹슬게 한다

글 입력 2023.01.2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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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으면, 상처받을 수 있는 일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이제는 무디어졌다 생각한,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해 꽤나 담담하게 이야기했는데, 그녀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더니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에겐, 이 사건이 “내가 상처받은 일”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상처받을 만한 일일 수도 있겠다. 분명 나는 제대로 화도 못 내고, 억울해서 눈물만 흘렸다. 


그런 내가 바보 같았던 건지, 내가 너무 작은 사람이었는지. 비판의 잣대는 어김없이 나로 향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똑같은 분노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망가지는 건 나인 기분이었다. 


가끔씩 꿈에 등장하는, 최악의 일. 앞으로 이런 일이 많겠지. 그럴 때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처리하면 앞으로가 분명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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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이해해” 라는 말이 얼마나 섣부른 말인지, 생각했다. 


미디어에서 고난과 역경을 가진 주인공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더 위대한 성공, 행복한 결말을 맞을 주인공의 필수조건은 불우한 환경과 트라우마가 될 만한 무시무시한 사건들이다. 


‘망각’이라는 신이 주신 좋은 업데이트 기능을 억지로 꺼가면서, 주인공은 과거를 복기하며 앞으로의 목표만을 향해 달려간다. 


꼭 이야기 속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각종 성공신화의 주인공은 많은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기구한 백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이 즘에서 다시 한번 친구의 혼잣말이 떠오른다. 


“될 수 있으면, 상처받을 수 있는 일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피하면 좋겠지.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될 수 있으면, 장애물을 비켜나가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인생은 영화 속 이야기처럼 개연성 있지가 않다.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무작위 한 이벤트들이 길 위에 펼쳐질 뿐이다. 


*


사실 나는 이야기 속 빌런에게도 서사가 있는 편을 좋아한다.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미묘한 난투극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빌런 때문에 상처받은 주인공만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진다. 


학교폭력을 소재로 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의 주인공 ‘동은’은 철저히 복수극 서사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강력한 복수를 위한 동기를 심어주기 위해, (사실 동기 따위가 필요할까 싶지만) 수위 높은 폭력 장면이 극 초반에 묘사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은’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야기의 빠른 전개와 복수라는 통쾌함에, 어느샌가 우리는 잊고 있지 않나? 생각해봐야 한다.  


동은은 여러 번 삶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그 순간에 살아남았다. 학교폭력, 가정폭력의 생존자로서 동은은, 그 자체로 응원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복수를 끝마치라고 응원할 수 있을까. 


동은 자신도 말한다. 자신도 방관자였다고. 


그렇다면 우리 또한 방관자였을 수도 있는 이 순간에, 그들의 마음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이야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폭이 넓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공포영화의 마스터피스라고 알려져 있는 1976년 작,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캐리(Carrie)>를 보자. 장르의 특성상 우리는 이미 비극적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영화 주인공 캐리 역시 <더 글로리>의 동은처럼 각종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인물이다. 


어떤 대화도 불가하며 신의 뜻에 따라 자식을 학대하기도 하는 광신도 어머니, 역시나 아무 이유 없는 학교 폭력 그리고 따돌림. 여기서 '캐리'는 살아남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캐리에게 희망이 될 만한 사건이 등장한다.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지만, 그녀는 나아가기 위해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동아줄을 최대한 꽉 붙잡아보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모든 희망은 철저히 부서지고 무너져내린다. 따뜻한 기억 하나라도 그녀에게 있었으면, 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 그런 기력조차 있었다는 게, 기적같은 일이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노력을 해야하는 건, 왜 꼭 캐리 자신이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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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출처 : IMDb)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는 그를 더 대단하게 만드는 고난과 시련이 있다. 시나리오 작법상, 그러한 시련은 인물을 더욱 매력적이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작법처럼, 피상적으로 바라보기에는 그들의 고통을 ‘감히 이해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스스로도 자신을 학대하게 둘 필요는 더더욱 없다. 


고통은 상대적이고, 대부분의 시련은 사람을 녹슬게 한다. 


구태여 내가 받은 상처를 깊이 후벼 팔 필요도 없고,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원인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다. 나를 망가지게 두지 말자. 

 

망가지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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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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