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Project 당신’의 하나로 나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는 플레이리스트에 늘 담겨 있던 네 곡을 통해 나를 설명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나를 소개할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나’라는 사람을 풀어낼 수 있을지 한동안 고민했다.
요즘 유튜브 채널 ‘머니그라피’의 비주류 초대석을 자주 보고 있다. 그 안에서 한 출연자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일을 꺼린다고 말했다. 취향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쉽게 파악되는 것 같아서라는 이유였다.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온 책과 본 영화, 그리고 반복해서 들었던 음악들이 결국 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조금은 부끄러운 고백에 가깝다. 내가 좋아해 온 영화들을 꺼내 보이며, 그 안에 담긴 나를 이야기하려 한다. 어쩌면 나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솔직한 방법은 없을 것 같아서.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
한국 개봉: 2022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한 사람이, 수많은 가능성 속 ‘다른 나’들과 연결되며 세계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영화는 무수한 선택지와 그로 인해 갈라지는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결국 ‘지금의 나’를 붙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한다.
평행우주 속 다른 ‘나’들과 연결되어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 속에서, 결국 다정함이 이긴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우리는 보통 더 강해져야 한다거나, 더 냉정해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영화는 정반대의 방향을 보여준다. 끝까지 남는 건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태도라는 것.
살아갈수록 마음의 여유는 점점 줄어들고, 다정하게 대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크게 와닿았다. 다정함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계속 선택해야 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택이 결국 나를, 그리고 관계를 바꾼다는 점이 좋았다.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감독: 빔 벤더스
한국 개봉: 2024년

도쿄에서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며 살아가는 한 남자의 반복되는 일상.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빛과 소리, 음악과 책 같은 아주 작은 요소들이 하루를 채운다. 이 영화는 거창한 일이 없어도 하루가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면서, 특별한 날만이 ‘완벽한 하루’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아무 탈 없이 흘러가는 하루가 더 ‘퍼펙트한 날’일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자꾸만 특별한 순간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지만, 사실 대부분의 날은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도 그 하루들이 쌓여서 결국 우리의 삶이 된다.
작년에 전세사기를 겪으면서 삶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는 것조차 당연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 속 인물처럼, 그저 정해진 일을 하고,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길을 걷는 하루가 더 크게 와닿았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지루한 게 아니라, 오히려 지켜내고 싶은 하루일 수도 있다.
어바웃 타임 (About Time)
감독: 리처드 커티스
한국 개봉: 2013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은 사랑과 가족, 그리고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는 더 나은 순간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바꾸기보다,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살아가는 법을 선택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지만, 그래도 꼭 인생 영화로 꼽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도 이 영화만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단순하게 말해주는 작품은 많지 않다고 느낀다.
나는 가족을 정말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떠올려 보면 결국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이별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함께하는 시간이 더 또렷해진다. 이 영화는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속의 사랑을 보여준다. 가족과의 식사, 사소한 대화, 함께 걷는 시간 같은 것들.
세상에 있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하나로 모아 놓으면, 이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틱, 틱… 붐! (Tick, Tick… Boom!)
감독: 린마누엘 미란다
한국 개봉: 2021년 (넷플릭스)

서른을 앞둔 예술가가 꿈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야기. 시간은 계속 흐르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들이 쌓여간다. 이 영화는 불안과 열망이 함께 있는 시기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뮤지컬로도 관람했을 만큼 좋아하는 작품이다. 단순히 좋아한다기보다, 지금의 나를 가장 정확하게 건드리는 영화라고 느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인생 영화’라기보다, ‘지금의 영화’에 가깝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고 지금의 고민에서 조금 멀어지게 되면, 이 영화가 지금만큼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를 설명하기에 이 영화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우리는 계속 고민하게 된다. 안정적인 길을 선택할지, 아니면 아직 확실하지 않은 가능성을 붙잡을지.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답을 주기보다는, 그 고민 자체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더 솔직하고, 그래서 더 지금의 나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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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 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비슷한 지점을 향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특별한 순간을 좇기도 하고, 반복되는 하루를 견디기도 하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결국 남는 건 지금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삶을 만든다.
어쩌면 내가 이 영화들을 좋아한다는 건, 나 역시 그런 고민을 계속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특별해지고 싶지만, 평범한 하루를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싶지만,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
그래서 나는 이 네 편의 영화를 통해 나를 설명하고 싶다.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