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들어선 건 공연 시작 10분 전이었는데, 배우들이 이미 무대 위에 있었다. 뱀, 토끼, 나무가 되어 온몸으로 자연의 소리를 내며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객석의 불도 아직 꺼지지 않았는데. 불경 소리가 섞여 흐르는 공간 속에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누군가의 깊은 무의식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삼매경>은 함세덕의 고전 '동승'을 이철희 연출이 재창작한 작품이다. 원작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어린 승려 도념의 이야기지만, 이 연극은 거기서 출발해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한다. 30여년 전 도념을 연기했던 한 배우가 그 공연을 '실패'로 여기며 그 시간 속에 갇혀버린다는 설정이다.
무대는 쉼 없이 과거와 현재 사이를, 연극과 현실 사이를 오간다. 어느 순간이 1991년이고 어느 순간이 지금인지, 저 사람이 극 중 인물인지 배우 자신인지 경계가 흐릿하다. 인물과 자연도 뒤섞인다. 14명의 배우가 바람이 되고, 시냇물이 되고, 계절이 된다. 절제된 움직임과 반복되는 시적인 언어들이 물결처럼 객석을 감싼다. 논리적으로 따라가려 하면 계속 미끄러진다. 그냥 흘러가게 두는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쉽지는 않았다. 생(生)을 통째로 무대에 게워내는 듯한, 무대에서 쏟아지는 에너지의 밀도가 너무 높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객석에 편히 앉아 보고 있을 뿐인데도 기를 쓴 건지, 중간에 잠깐 졸기도 했다. 난해함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냥 무대의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그 찰나의 졸음조차 이 연극이 선사하는 몽환적인 체험의 일부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연극의 제목인 '삼매경(三昧境)'이란 잡념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에 몰입된 상태를 뜻한다. 무대는 관객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 경계 어딘가에 데려다 놓는다. 이해와 감각 사이, 깨어있음과 잠겨듦 사이에.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건 지춘성 배우다. 그는 실제로 1991년 연극 <동승>에서 어린 승려 도념을 연기하며 이름을 알렸다. '영원한 동승'이라는 수식어는 이후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영광이기도 했지만,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기도 했다. 무대를 떠나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공백의 시간들, 그럼에도 결국 다시 무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숙명. 예술가란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온전히 행복하지도 않은.
<삼매경>은 그 이야기를 정면으로 건드리며 묻는다. '연극에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다는 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나이 든 지춘성이 다시 도념 앞에 선다. 살짝 쉰 듯한 목소리로 객석을 가득 채우며 쏟아내는 말들 속에서, 이게 극 중 인물의 대사인지 배우 자신의 고백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삶 자체가 무대에 붙들린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연극이 삶을 흡수하는 건지, 삶이 연극 속으로 새어 들어오는 건지. 그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이 이 연극에서 가장 강렬했다.
무대 자체도 인상적이었다. 낡은 나무판자 바닥에 회색빛으로 바랜 벽, 차갑고 어두운 조명. 군더더기 없이 비어 있는 공간인데 이상하게 꽉 찬 느낌이었다. 중간에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무대 바닥이 연못처럼 변하는 순간이 있었다. 연꽃이 그 위에 놓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전해지는 장면이었다.
이철희 연출은 이 작품이 실패를 극복하는 영웅 서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실패는 사라지지 않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를 끝내 감당하려는 태도, 그것이 이 연극이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끝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직업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고, 한때의 선택일 수도 있다. <삼매경>은 그것을 극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무게와 함께 걸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완성이라고, 조용히 건넨다.
공연이 끝나고 한동안 멍했다.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이라는 말은 오래 남았다.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4월 5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