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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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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2일 광화문에 문을 연 씨네큐브는 25년간 한결같이 자리를 지켜온 국내 최장수 예술영화관이다. 그 기간동안 이곳은 다양한 독립·예술영화와 활발한 GV, 국내외 영화제 수상작들을 만날 수 있는 상영관을 넘어, 영화 애호가들에겐 '변치 않는 오랜 친구'와 같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사실 영화관이라는 곳 자체가 참 특수한 장소다. 특히 씨네큐브 같은 예술영화관은 더더욱 그렇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오직 한 영화를 보러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여 앉아 있는다. 그래서 그 자체로 하나의 '안전 공간'이 된다. 나는 숨고 싶을 때 극장을 자주 찾았다.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아무것도 하기 싫거나, 잠시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은 날에 말이다. 극장은 어두워서 내가 나를, 혹은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혹은 보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마음껏 웃거나 울고, 때로는 까무룩 잠이 든다.


단돈 만원 남짓한 금액으로 수백 명의 열정이 담긴 합작품을 사고, 그저 스크린 앞에 앉아만 있으면 나를 새로운 생각과 장소를 데려다주는 영화를 난 언제나 사랑해 왔다. 모두가 한자리에 앉아서도 각자의 휴대폰을 쳐다보며 딴생각을 하기 바쁜 시대에, 하나의 작품에 다 같이 몰입하고 그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다. 심지어 영화는 수십 년, 아니 억겹의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내 보아도 우리를 연결해 주는 아주 좋은 대화 소재가 되어주기도 하니 말이다.

 

씨네큐브 개관 25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화 <극장의 시간들>은 바로 그 극장의 공기를 이종필, 윤가은, 장건재 세 명의 감독이 각기 다른 시선으로 담아내고 엮은 시네마 러브레터다. 94분의 시간 동안 영화는 관객과 창작자, 그리고 극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가로지르며 마치 평행우주를 여행하듯 극장의 안팎을 유영하게 한다.

 


[프롤로그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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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씨네큐브에서 수십 년을 일하신 영사기사님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처럼 담으며 시작된다. 관객이 자리에 앉아 스크린 속에 빠져드는 순간, 뒤편 작은 창 너머에서 묵묵히 필름을 돌리는 누군가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한다. 영화는 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스크린 안으로 불러낸다.

 

덕분에 극장은 단순한 상영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의 성실한 시간이 겹겹이 쌓인 입체적인 장소로 다가온다. 영화가 끝난 뒤 영사실의 작은 창을 사진으로 남기는 관객들의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침팬지, 이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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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광화문에서 영화 하나로 뭉쳤던 세 친구 고도, 모모, 제제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헌책방에서 발견한 기묘한 침팬지 이야기에 홀렸던 청년들의 시간은 흘러가고, 고도는 2025년 영화감독이 되어 그 시절을 추억한다. 원슈타인, 김대명, 이수경, 홍사빈 배우가 빚어낸 호흡은 영화는 오랜 친구와 같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증명한다.

 

영화는 현실과 환상 속을 넘나들며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극장에서 함께 웃고 울며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과의 기억을 사랑하는 일임을 깨닫게 한다.

 

 

[자연스럽게, 윤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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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진실을 포착해온 윤가은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창작의 고뇌를 재치 있게 풀어낸다. 배우 고아성이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내려 고군분투하는 감독 역할을 맡았다. 윤가은 감독의 전작들은 실제인지 연기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자연스러운 아역 배우들의 연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는 평소 보거나 상상하기 힘들었던 카메라 뒤편 제작진의 치열한 세계를 보여준다. 관객이 아닌 관계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 제작 과정은, 우리가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자연스러움’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민과 열정 끝에 탄생하는지 실감하게 한다.

 

 

[영화의 시간, 장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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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단편은 춘천에 사는 ‘영화’가 우연히 씨네큐브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고등학교 동창 ‘우연’을 재회하며 시작된다. 이 영화는 영사기사, 극장 매니저, 감독, 그리고 관객까지 극장을 둘러싼 모든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극장을 삶의 터전이자 쉼터로 삼는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엮어낸다.

 

양말복, 장혜진, 권해효 등 베테랑 배우들의 열연은 극장이 일터이자 꿈 같은 쉼터가 되기도 하는 마법 같은 공간임을 보여준다.

 

*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 어둠 속에서 잠시나마 연결되었던 우리는 다시 모르는 사이가 되어 각자의 삶으로 흩어진다. 이 적당한 거리감의 공동체가 좋다.

 

비록 다시 타인이 되어 흩어질지라도, 어둠 속에서 함께 숨 쉬었던 그 찰나의 뜨거운 공기는 사라지지 않고 든든한 위로가 되어 우리 곁에 남는다. 우리가 왜 여전히 굳이 극장에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

 

3월 정식 개봉을 앞둔 이 영화는 영화와 극장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고마운 선물이 될 것이다.

 

늘 내 곁에 있어줘서, 극장에게 그리고 영화에게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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