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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미몽과 다이 마이 러브, ‘자기만의 방’을 향한 100년의 갈망 [영화]

'미몽'과 '다이 마이 러브' 속 모성 이분법과 실존적 고립에 관하여

by 서지민 에디터
2026.03.22 12:53

 

 

최근 수업에서 조선 식민지 시대 영화들을 다루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드라마나 영화는 흔히 접해왔지만, 당대 조선인들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진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게 생소하게 다가왔다. 사실 90년 전의 식민지 조선 영화를 자발적으로 찾아볼 이유는 그리 많지 않았고, 영화사를 배울 때조차 한국의 고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해볼 필요성을 느낀 적은 없었다. 과제를 위해 의무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먼지 쌓인 텍스트로 느껴졌던 양주남 감독의 1936년 작 '미몽'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뜻밖의 익숙함이었다. 1930년대 영화임에도 서사 구조에서 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가부장적 질서를 이탈한 여성을 타락시키고 파괴하는 서사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씁쓸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가부장제 안에서의 여성 억압은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기에 '미몽'의 이야기는 멀게 느껴지지 않았고, 90년이라는 세월이 생각보다 긴 시간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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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친구들과 관람한 린 램지 감독의 신작 '다이 마이 러브(Die, My Love)'와 90년 전의 흑백 필름 '미몽'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린 램지는 여성을 향한 타자화적 시선과 사회적 억압이 초래하는 모성의 왜곡을 꾸준히 다뤄온 감독이며, 이번 다이 마이 러브에서도 그 주제를 날 것의 감각으로 다룬다.

 

기존의 전형적인 비평은 미몽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곤 한다. “가부장적 질서를 이탈한 여성 ‘애순’이 허영과 향락 끝에 비극적 파멸을 맞이하고, 최종적으로 자살을 통해 모성애로 회귀하며 응징당하는 권선징악적 멜로드라마.”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현대 사회에 여전히 잔존하는 여성상에 대한 프레임을 이중으로 덧씌우는 한계를 지닌다. 나는 미몽 속 주체의 자살이라는 선택이 죄책감에 의한 징벌적 파멸로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를 린 램지의 신작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전혀 다른 문화권의 두 영화가 연결되는 지점은 인상 깊었다. 다이 마이 러브 역시 전통적 여성상 수행과 가부장제 안에서의 ‘일탈-파멸’ 구조를 차용하는 듯 보이나, 엔딩에서 주인공 그레이스의 선택은 그녀가 세상을 향해 가하는 역(逆)징벌의 느낌을 강렬하게 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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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순의 욕망과 파멸을 다루는 방식은 식민지 조선의 특수한 상황을 넘어, 1930년대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던 견고한 가부장적 의식과 보수화된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답습한다. 주인공의 이름을 영어식인 ‘애나(Anna)’로 바꾸어도 서사적 괴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 영화는 신여성에 대한 남성 사회의 공포를 처벌하는 보편적인 여성 혐오적 문법을 활용한다. 특히 근대화의 상징인 ‘속도(자동차, 기차)’를 애순을 향한 징벌적 장치로 설정하여 그녀를 ‘딸마저 죽이는 악녀’로 몰아가는 연출은, 근대화의 진정한 폭력성을 은폐하고 비판의 화살을 ‘신여성’ 개인에게 돌려 그녀를 악마화한다. 결국 영화는 애순의 일탈만을 부각함으로써 식민지 근대화의 파괴적 속성과 가부장적 압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교묘히 회피한다. 시대의 비극을 한 여성의 도덕적 타락으로 박제하는 이러한 방식은 본질적인 모순을 은폐하려는 기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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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애순의 자살을 ‘일탈에 대한 징벌’로 읽는 것은 인물의 주체성을 거세하는 오역이다. 이는 체제 순응보다는 ‘남성적 징벌권’을 무력화하기 위한 능동적 도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자살 직후 남편이 폭력적으로 들이닥치는 장면은,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 경우 마주해야 했을 가부장적 처벌의 무게를 시사한다. 애순의 죽음은 모성적 죄책감에 의한 굴복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있어도 달라질 것 없는 미래를 예견한 주체가 시스템의 폭력보다 앞서 생을 마감함으로써 세상을 징벌하고 영원히 도망치기를 선택한, 실존적 결단으로 읽힌다.

 

영화 후반부, 길게 묘사되는 애순의 죽음 직전 표정 변화는 기존의 ‘죄책감’ 서사로는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딸의 생존 사실에 대한 찰나의 안도감 직후 그녀의 얼굴에 드리우는 것은 삶의 동력을 상실한 자의 허무와 피로감이다. 만약 애순의 선택이 단순한 모성적 속죄였다면, "가지 말라"고 절규하는 딸을 뒤로한 채 음독을 강행하는 행위는 논리적 모순에 직면한다. 결국 이 장면에서 목격되는 애순의 표정은 딸을 향한 회귀의 의지가 아니라, 다시 가부장적 질서 안으로 포섭되어 ‘어머니’라는 배역을 수행해야만 하는 미래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다. 그녀의 음독은 죄인으로서의 자결이 아니라, 더 이상 빼앗길 주체성조차 남지 않은 삶을 스스로 정지시킨 최후의 주권 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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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택은 다이 마이 러브의 그레이스가 보여주는 엔딩과 깊게 공명한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는 세계와의 실존적 부조화를 뒤로 한 채, 자신의 기록이 담긴 일기장과 숲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화기(火氣)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일체의 사회적 억압을 벗어던진 나신(裸身)으로 죽음을 향해 직진하는 그녀를 남편은 단지 응시할 뿐, 가부장적 권력으로도 그 행보를 막아서지 못한다. 이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파괴적 종말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주체적 해방인 동시에 자신을 억압해 온 세상을 향한 ‘역징벌’이자 서사적 조소다. 애순의 음독 역시 가부장제가 씌우려던 ‘속죄하는 어머니’ 혹은 ‘처벌받는 악녀’라는 마지막 프레임을 거부하고 시스템의 단죄를 앞질러 탈주했다는 점에서 그레이스의 선택과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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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비평들은 애순을 이미 ‘결격 사유가 있는 어머니’로 전제한 채 논의를 전개한다. 이는 여성의 욕망 표출을 ‘모성애 부재’나 ‘악행’으로 규정하며 가부장적 시각을 답습하는 행위다. 극 초반 애순이 딸을 위한 양복을 구매하러 나선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욕망하는 주체’와 ‘헌신하는 어머니’를 양립 불가능한 가치로 분리하는 것 자체가 폭력적인 이분법이다. 특히 딸에게 어머니에 대한 혐오를 심고 둘을 물리적으로 격리한 실질적 주체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도덕적 책임은 애순에게만 전가된다는 사실은 서사 내에서 철저히 소거된다.

 

이러한 프레임은 그레이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개인의 실존적 우울과 욕망을 지닌 그녀가 어머니가 된 순간, 사회는 그 우울을 ‘산후우울증’이라는 의학적 범주 내에 가두어 관리하려 든다. 가족들은 그녀가 미화된 모성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애착이 결여되었다고 단정하지만, 정작 그레이스는 남편과 강아지와 같이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존재들이 거슬릴 뿐 아들을 항상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린 램지 감독은 이처럼 여성이자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입체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의 협소한 시선을 냉소적으로 풍자하며, '모'가 아닌 자들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폭력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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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 속 ‘호텔’ 또한 단순한 향락지가 아닌, 가부장제 외부에서 유일하게 ‘고객’이라는 익명의 주체로 존재할 수 있는 해방구로 기능한다. 남성에게 ‘집’이 권력의 중심지라면, 여성에게 집은 ‘현모양처’로서 기능해야 하는 감옥과 같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이 호텔이라는 경유지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100년 전 애순이나 현대의 그레이스나 여성이 처한 실존적 고립과 가부장제의 폭력성이 본질적으로 동일함을 보여주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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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몽이 90년 전의 흑백 필름임에도 여전히 유효한 담론을 던지는 이유는, 여성을 ‘개인’과 ‘모성’으로 분리하여 단죄하는 문법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평론은 애순을 시대의 수동적인 피해자로 기록할지 모르나, 실존적 시각에서 그녀의 죽음은 자신을 가두려던 세상을 앞질러 떠난 주체적 탈주로도 이야기되어야 한다. 다이 마이 러브가 보여주듯 여성의 욕망을 ‘증상’이나 ‘타락’으로 치부하는 시선에 맞서, 미몽에 담긴 애순의 저항 의지를 묵살해서는 안 된다. 전혀 다른 시공간 속 두 여성의 선택을 비극에 대한 연민으로만 바라보기보다, 시스템에 자신을 맞추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스스로 내던짐으로써 세상을 거부한 강한 분노를 읽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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