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연과 상상, 일상 속의 비일상을 담아낸 영화 [영화]

영화 <우연과 상상> 리뷰
글 입력 2022.05.2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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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감상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우연과 상상! 일본의 새롭게 떠오르는 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2022년 5월 4일에 개봉하여 현재 상영 중이다. 나는 이번 영화를 통해 감독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느낀 것은, 진한 여운과 전율이었다. 영화는 우연과 상상을 테마로 하는 세 단편으로 이루어진 에피소드식 구성이며 각 단편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벌써 한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단편’의 특성상 전개를 위해 빠른 호흡과 명확한 주제를 가진 내용이 등장할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에피소드별로 인상 깊었던 지점을 살펴보고, 영화에 사용된 기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감상을 권하고 싶은 작품이므로, 기회가 된다면 꼭 영화를 본 뒤에 리뷰를 읽기를 추천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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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관심이 있다고 밝힌 남자가, 과거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다는 걸 알게 된 여자의 이야기.

내 친구의 남자친구가 나의 전 남자친구라는 비극적 우연과, what if라는 상상 끝에 내린 현실적 결론.


미련.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키워드였다. 왜 하필, 내 절친이 사랑한 사람이 그 남자일까? 이 비극적인 우연을 나는 비교적 이른 시점에 알아차렸다.

 

 

“돌아가 주세요.”

 

 

친구와의 수다가 끝난 뒤 정색하며 굳어버린 메이코의 얼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남자는 전 애인이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대. 전적이 있는 너라도 대신 사과해야겠다. 장난기 어린 얼굴로 미안하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그 전 애인, 정확히 그 사람. 과거 연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메이코는 그를 찾아가고, 그 역시 잊지 못했기에 떠나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감정에 휘둘려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로.

 

‘미련’이라는 감정은 대체 뭘까? 그 갑갑하고 음습한 단어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픈 유리 조각으로 남는다. 혹시 내가 그때 다르게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좀 더 빨리 용기를 냈다면,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만난다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What If’는 없다.나는 그 사실을 늘 되새기며 산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과정에서 동전의 반대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즐겁고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를 갉아먹는 ‘그랬다면?’이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들린다. 인간은 상상을 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다른 가능성에 대해 곱씹으며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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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법처럼 놀라웠던 사랑보다 더 불확실한 과거의 미련. 추억의 망령을 벗어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실제로 여자는 붙잡았고, 남자는 흔들렸다. 하지만 결국 결말은 과거와 같았다. 미래가 아름다운 이유는 내 결정으로 인해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후회, 미련, 돌아가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판단을 흐린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본능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과거 속에 얽매여 주변을 보지 못한다면, 남은 것은 비극적 결말의 반복일 뿐이라는 것을. 그랬기에 메이코는 결국 과거 속으로 물러났다. 미련 가득한 마지막 상상을 끝내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상상 뒤의 현실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영화는 지나치게 설명적일 필요가 없다. 친구에게 진실을 밝히고 뛰쳐나가는 장면에서 에피소드가 끝났어도, 관객은 우연과 상상이라는 영화의 제목으로부터 메이코의 상상일 수 있다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혹은 현실로 여겨 다른 방향의 의미를 도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실을 밝혀버려 관객이 상상할 기회를 박탈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전 애인을 만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까? 과거 느꼈던 추억을 훑으며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자연히 불안해진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신뢰가 견고해지더라도 과거의 불확실성을 어쩌면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래서 더욱 공감 가는 주제인 것 같다.

 

이 에피소드의 결말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메이코는 친구와 전 남자친구를 두고 자리를 비켜준 뒤, 사진을 찍는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을지 영화가 끝나고도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메이코의 직업이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직업은 ‘모델’이다. 모델은 남에게 사진을 찍히는 역할에 해당한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그녀는 자기 손으로 눈앞의 풍경을 찍었다. 즉, 시점이 반대로. 완전히 전환된 것이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스스로 과거의 망령이 되려고 했던 메이코가, 결국 상대의 입장을 고려한 결정을 내렸음을 암시하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두 번째 에피소드: 문은 열어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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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대학교수에게 낙제 당한 남학생이 복수를 위해 여자친구를 교수실로 불러들이게 된다.

교수의 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한 아찔한 우연, 그리고 세상의 상상이 빚어낸 편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이다. 나는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세가와’ 교수의 정직한 인품에 감동했다. 그는 항상 문을 열어 두고, 이는 영화 내내 매우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문을 닫는 행위는 곧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문을 열어둔 채로 두는 것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 위한 그의 신조였다. ‘정직함’을 지키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세가와 교수는 온갖 유혹을 벗어나 평생 그 가치를 지켜왔다. 그 고결한 정신이 너무나도 존경스럽고 대단했다. 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가치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우연으로 인해 세상에 퍼진 녹취록, 그리고 왜곡된 시선들.

 

두 사람의 대화는 다소 자극적인 소재가 오가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성적 내용을 나눈 녹취록이 퍼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들의 상황과 감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의 잣대는 그저 녹취록의 대화를 교수와 제자의 밀회로 평가했을 뿐. 나는 그 대화 속에서 성적인 것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느꼈다. 세가와 교수는 성적 욕망을 포함해 자신의 모든 욕구를 절제하는 사람이었기에 나오는 그저 그가 그것을 터뜨리기를 바랐다. 이를 통해 나올 수 있는 작품의 긍정적인 성장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는 현실과도 비슷하다. 성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지만 사회에서는 숨겨야 하는 은밀한 것으로 취급된다. 감독은 이러한 사회 풍조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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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에피소드 역시 지나친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장 적절한 에피소드의 마무리는 여학생인 나오가 메일 주소를 ‘사가와’로 잘못 입력했다는 사실이 공개된 지점이다. 그 이후에 세상에 녹취록이 퍼지고 비참한 신세가 된 나오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 영화는 제목이 우연과 상상인데, 왜 이리도 관객의 상상을 제한하는 것인가? 결말의 연장만 없었다면 정말 완벽한 마무리였다는 개인적인 감상을 전하고 싶다.

 

 


세 번째 에피소드: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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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인 여성이 한때 짝사랑했던 옛 동창과 20년 만에 만나 추억을 회상한다.

서로를 지인으로 착각한 우연과, 상상을 통한 치유의 시간.


나츠코와 아야는 생판 남이다. 하지만 서로를 다른 누군가로 착각해 고등학교 동창으로 오해하고, 자세한 설명 없이 집에 가 담소를 나누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오해를 깨닫지만, 타인이기에 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우정을 이어 나간다. 정말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도 길을 가다가 잘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을 때, 따라서 리액션을 한 경험이 있다. 민망한 상황이 될까 봐 했던 반응이 웃긴 해프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타인’이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테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애초에 모두 타인이다. 시간이 흘러 관계가 생기며 지인이 되는 것뿐. 나츠코와 아야 역시 사실은 아무 연관성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서로를 치유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며, 위로와 공감에 필요한 것은 상대방을 위한 마음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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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이 있다면 불필요한 시대적 설정이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일종의 바이러스로 인해 전자기기가 먹통이 되고, IT 산업이 망했다는 배경하에 진행되는데, 꼭 필요한 장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꼭 필요한 설정이 아니라, 애초에 그 설정으로부터 이야기를 발전시켜 유지했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삭제했다면 억지스러운 느낌을 더욱 배제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현재는 영어로 Present, 다른 말로 하면 선물이죠.”

 

 

이 에피소드에는 동성애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나츠코가 과거 연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좀 더 용기 낼 걸, 과거에 대한 후회와 진심이 담긴 말들이 나를 울렸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야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의 선택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 나의 가치관을 다시금 실감한 순간이었다.

 

 


영화가 의도를 드러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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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효율적인 장소 활용. 에피소드별로 장소의 변화가 많지 않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택시, 두 번째 에피소드의 교수실, 세 번째 에피소드의 집 공간에서 대부분의 대화가 이루어지면서 매우 밀도 있는 공간 활용이 이루어졌다고 느껴졌다. 장소 이동이 많지 않아 오히려 배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둘째, 배우의 정면 시선. 촬영할 때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 있다. 바로 배우가 똑바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일이다. 영화 중 특정 장면에서 배우는 마치 관객에게 말하듯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런 샷은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을 강조하고 싶을 때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제4의 벽을 넘어 관객에게 영화 속 상황에 들어간 듯한 착각을 선사한다.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 아니기에 더욱 기억에 남았다.

 

셋째, 고정된 카메라 구도. 카메라가 긴 호흡을 가지고 배우들을 한 화면에 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마치 그들의 일상을 관찰카메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주어 영화의 현실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카페에서 옆자리 사람의 얘기가 들리는 것과 비슷했다. 그 정도로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프레임 속 장면을 담아냈다.

 

넷째, 배우의 일상 연기. 영화를 보면서 특이하다고 생각한 점은, 배우들이 배우 같지 않다는 점이다. 즉 우리 주변에 있는 인물을 카메라 앞에 세워놓은 것 같았다. 배우들은 마치 일상생활에서 말하듯이 대사를 던진다. 발성이 좋거나, 발음이 명확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스크린 안의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내 주변에서도 언제든지 볼 수 있을 법한 사람들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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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거리낌 없이 영화에 담아낸다. 마치 ‘숨기지 마라. 해야 할 이야기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보폭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다. 덕분에 평소 생각하지 못한 소재를 접할 수 있었으니까. 이 감독의 스타일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우연과 상상이라는 주제, 흡입력 있는 단편 시나리오, 일상 속의 비일상을 훌륭하게 풀어낸 지점이 좋았다. 상상력을 제한하는 닫힌 결말의 요소가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영화는 나에게 끊임없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주었다. 개인적으로도 쉽게 잊지 못할 의미 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사랑과 감사를 보내며, 리뷰를 마치고 싶다.

 

출처

우연과 상상(2022),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그린나래 미디어 배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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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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