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레오 까락스의 모던 러브 [영화]

Leos Carax, (1986), <Mauvais Sang>
글 입력 2024.05.15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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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모터스>를 보고 레오 까락스와 드니 라방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독특한 영화 소재와 그 소재를 돋보이게 해주는 훌륭한 연기력. 단번에 레오 까락스의 페르소나가 곧 드니 라방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곧바로 <나쁜 피>를 재생했고, 며칠째 그 영화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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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까락스의 미래 도시는 STBO 질병으로 뒤덮여 있다.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한 대가. 둘 중 한 명에게만 사랑이 없더라도 대가는 두 쪽 모두에게 동일하다. 젊을수록 확률이 높아지는 이 역행성 바이러스는 영화 전반의 주제 의식을 책임지고 있다. 알렉스는 아버지의 친구들과 함께 STBO의 백신을 훔칠 계획을 세운다. 새로운 삶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알렉스는 편지를 남기고 리즈를 떠난다.

 

떠나는 과정에서 낭독되는 편지의 내용을 들으며 생각한다. 알렉스는 리즈를 사랑했을까. 분명 리즈를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장면이 다수 있음에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런 의문을 떨칠 수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나에 대한 알렉스의 주체 할 수 없는 사랑을 보았기 때문일까. 단순히 그것만이. 간간이 배를 움켜잡는 알렉스가  STBO에 걸린 것은 아닐지 의심하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는 걸까.

 

리즈에 대한 알렉스의 사랑과, 안나에 대한 알렉스의 사랑은 분명히 다르다. 과연 STBO가 겨냥하고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려나. 상대방을 위해서 죽음을 불사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만이 진짜 사랑인 걸까. 아니면 그저 상대방과 함께 있을 때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만으로도 STBO를 피해 갈 수 있는 것일까. <나쁜 피>가 STBO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사랑을 소외시키고 특정한 사랑을 숭배하기 위함이 아닌, 단지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충격적으로 좋았던 장면. 이 영화는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테다. 클래식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디오, 창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알렉스. 그러고선 시작되는 1층의 줄리엣이 5층의 크리스토프에게 보이는 음악은 일렉트로닉 한 전주와 함께 알렉스가 배를 움켜잡게 만든다. 데이빗 보위의 <모던 러브>라며 곡의 정보를 정확히 명시한 탓에, 알렉스의 몸짓 하나하나가 모던 러브 시대 속의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달까.

 

타케우치 마리야의 <플라스틱 러브>가 떠오르는, 경쾌한 리듬 속 어딘가 허무한 느낌. 가사를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담배를 물고, 힘겹게 내딛는 한 발짝은 어느새 무언가에 의해 끌어당겨지는 것처럼 과감하고 벅찬 발걸음이 된다. 정말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울컥하게 만드는 그의 달리기는 대체.. 지독하게 슬퍼 보이기도, 어딘가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다. 자신 안의 무언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잔뜩 표출해 내는 그의 움직임에서 이유 모를 위로를 받아 갈 지경이다.

 

뚝 끊겨버린 음악에 대비하지 못한 듯 급하게 달리기를 멈춘 알렉스는, 들려오는 희미한 콧노래를 뒤쫓아 다시 오던 길을 따라 달려간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붉은 색 침대, 위에 올려진 노란색과 파란색 휴지. 급하게 연 화장실 문 안쪽에는 머리를 손질하는 안나가 파아란 실크 잠옷을 입고 서있다. 다시 문을 닫고 나온 채로 안나에게 말을 건다.

 

 

안나!

왜요?

순간의 사랑을 믿어요?

순간적으로 찾아와 영원히 지속되는...

 

 

누군가 나에게 순간의 사랑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문밖에서 안나를 훔쳐보는 남자를 내세워 그 대답을 대신할 수 있겠다. 안나의 첫사랑을 닮은 그 남자.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때 그 첫사랑의 모습을 빼닮은 남자는 순간의 사랑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닐까. 의대생이었던 그와 주사기로 서로의 피를 뽑아 마시던 시절을 추억한다.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니 말이다. 사랑은 다양하고, 순간적이고, 또 때론 지속적이다. 마치 안나가 마크를 사랑하지만, 또 알렉스를 사랑하고, 문밖의 남자에 첫사랑을 투영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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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가 죽자, 안나는 하염없이 달린다. 리즈는 어딘가 화가 난 듯 알렉스가 남긴 오토바이를 타고 다시 떠나버린다. 쫓아오는 마크를 뒤로한 채 달리는 안나의 모습은, 양팔을 벌린 채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달리는 안나의 모습은. 슬픔을 넘어 자유롭고 아름답다. 안나도 알렉스를 사랑했구나. 그게 비록 알렉스가 꼭 바라던 형태의 사랑이 아니었을지라도. 안나가 알렉스를 사랑하는 것이 확실하다. 저 달리기를 멈추어도 여전히 사랑하겠지.

 

영화 <몽상가들>과 왕가위 감독이 생각나는 아름다운 미장센. 그 미장센에 어우러져 펼쳐지는 어지러운 청춘의 사랑들. <나쁜 피>를 보고 나면 슬픈 마음이 든다. 슬픈 영화라기 보다는 슬픈 마음이 드는 영화랄까. 순간의 사랑, 어쩌면 모던 러브, 또 어쩌면 책임 없는 쾌락을 꼬집고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사랑 그 감정 자체를 긍정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혼재되어 뒤엉켜있는 휴지 뭉치들 같은 영화. 감독이 원하는 건 젖어서 이미 모양을 잃어버린 휴지들을 분해하고, 끄집어내서 쳐다보고 손가락질 하기보다는. 그저 그 휴지 뭉치 자체가 지니고 있는 위태롭지만 분명한 사랑성.... 그 미숙함과 미완의 아름다움을 조명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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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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