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내 이야기로 영화, 연극, 음악 등으로 만들어본 경험이 있을까. 그렇게 만들고 나서 그 작품 자체를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된다. 작품이 완성된 후의 결과물보다,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 작은 성취들, 그리고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훨씬 더 오랫동안 마음에 머물러 있다.
영화 관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극장에서 처음 본 경험, 그곳에서 졸았던 경험, 옆사람이 신경 써서 내용을 놓친 경험들. 영화표를 사고 자리에 앉기까지의 모든 과정, 극장 특유의 냄새와 어두운 조명, 스크린 앞에서의 기다림까지. 때로 우리는 영화 자체의 내용보다,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경험에 더 깊이 빠져든다.
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과정도 또 다른 이야기다. 감독이 영감을 받던 순간, 배우들이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애쓰던 촬영장, 흘러나오는 영화관을 지키는 사람들. 영화 한 편이 상영되면서 생기는 그 모든 것들이 켜켜이 쌓여 스크린 위의 2시간이 되는 것이다.
《극장의 시간들》이라는 제목만큼 이러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을까.
3명의 감독이 3편의 에피소드로 엮어낸 이 작품은 영화에 대한 다양한 추억과 경험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 예술영화관 씨네큐브의 개관 25주년을 맞아 제작된 이 영화는, 단순한 기념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것은 영화 자체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이 담긴 작품이다. 주변에서 나를 영화하게 한다.
무슨 침팬지 같은 소리야
[침팬지] | 감독 이종필 | 출연 김대명, 원슈타인, 이수경, 홍사빈
예술영화는 참 어렵다. 논리적으로 풀어낼 수 없는 감각이 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도가 숨어 있다. 하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이 나의 발걸음을 영화관 앞에 세워둔다. 《침팬지》도 마찬가지다.
2000년 광화문. 고도, 모모, 제제라는 세 사람이 씨네큐브에 모인다. 예술영화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으로 단짝이 된다. 헌책방에서 발견한 '침팬지'의 이야기는 대부분의 동물 설명과는 다른 시점을 보여준다. 침팬지를 단순한 동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담고있는 특별한 존재로 본다. 이에 몰입한 고도는 이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지만 사람들로부터 혹평을 받는다. 침팬지에 담긴 감독의 의도와 이유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치 내 오랜 친구가 왜 지금까지 친구인지,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이끌림으로 친해지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논리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의 경험과 감각의 영역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할 수도,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경험일 수도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진 개성과 환경에 따라 어떤 영화든 우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의아해하고, 누군가는 진심으로 감동한다. 그것이 영화의 신비로움이다. 내가 《극장의 시간들》을 좋아하는 이유도 《침팬지》와 같다. 함께 본 사람들은 이 영화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하지만, 내가 가진 경험이 이 영화와 같은 공명을 이루는 지점이 있는 것 아닐까.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느샌가 나도 그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 감독 윤가은 | 출연 고아성
영화 속은 언제나 완벽하다. 그 날씨, 그 사람들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 이미 연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터무니없이 완벽하게 생각된다. 배우들의 한 마디 대사, 카메라가 포착한 신체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계산되고 설계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이것은 수많은 시도 끝에 발현된 하나의 장면일 뿐이다. 그 완벽함 뒤에는 몇십 번의 실패와 재시도가 숨어 있다.
영화 《자연스럽게》에서 감독은 아이들을 어르고 달랜다. 그 상황에 몰입되도록 상황을 설명해주기도 하고, 흥을 돋운다. 연기는 강요될 수 없다는 것을 감독은 잘 알고 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령이 아니라 신뢰와 안내다. 감독은 아이들 옆에서 함께 웃고, 함께 뛰고, 함께 놀아준다. 어느새 감독과 스태프, 그리고 아이들 모두가 서로의 해맑은 모습에 동요된다. 누가 감독이고 누가 배우인지 구분이 사라진다. 놀이터에서 함께 놀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화가 가장 자연스러워지는 순간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코 감독의 완벽한 계획이 실행되는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계획이 깨지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모두가 그 순간에 집중하게 될 때다. 제작진은 최선을 다해 장면을 설정하지만, 진정한 마법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순간들이다. 아이의 예상 밖의 표정, 태양의 각도, 바람의 방향,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만나서 완벽한 장면이 완성된다.
결국 가장 자연스러운 영화는 배우와 스태프가 모두 상황에 녹아든 순간을 포착했을 때 탄생한다. 그것은 누군가 하나의 완벽한 수행이 아니라, 모두가 모두에게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집단의 에너지다. 그것이 가장 완벽한 연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수많은 "레디, 액션!"으로 사람들은 영화를 만들어간다.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
영화 속에서만은 오직 너야
[영화의 시간] | 감독 장건재 | 출연 양말복, 장혜진, 김연교, 권해효, 이주원, 문상훈
바쁜 일상 속에 영화 한 편을 찾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 일기를 쓰기 어려운 것처럼 영화관을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계속 바쁜 이유를 찾으면서 중요한 것들을 뒤로 미룬다. 그렇게 미루다 보면 어느날 그것이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몇 주, 몇 달, 몇 년이 흘러가다 보면 그 존재를 잃어버리게 된다. 춘천에 사는 주인공 영화는 오랜만에 광화문 씨네큐브에 와 여고 동창을 만나게 된다. 영화관에서 일하고 있던 동창은 영화에게 영화 티켓 한 장을 쥐어주게 된다. 영화는 오랜만인듯 영화를 보기 시작하지만 이내 잠에 든다.
영화는 무엇인지 보여주지도 않은 채 그저 흘러간다. 극장에 앉았음에도 마음은 여전히 밖에 있고, 사실 관객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을 잠들게 한 건 영화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걸 괘념치 않은 채 그저 흘러간다. 마치 상영을 관리하는 엔지니어처럼. 영화가 어떤 것이 되든 계속해서 상영된다. 누군가는 잃었던 자신을, 친구를 다시 만나고 예매했던 영화가 원래 다음 날과 같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히려 더 영화같은 시간이 아닌가.
영화인들과 함께 이런 시간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을 위해 영화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관계자와 그런 영화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만남을 지속해서 보여준다.
하나의 영화로 불러일으킬 누군가의 감정과 조금의 감상만 있다면, 잠을 일으키고, 악플이 달려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누군가가 극장에 앉아서 자신의 잠들었던 감각을 깨어날 수 있다면,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진정한 이유라고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미쟝센단편영화제 최고 화제작으로 선정된 위의 이종필, 윤가은, 장건재 감독의 시네마 앤솔로지 《극장의 시간들》이 3월 개봉한다.
이 영화는 단순히 세 편의 영화가 아니다. 극장에 앉아 있던 우리 모두의 기억이 담겨 있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왜 계속 영화 앞에 서 있는지 극장에서의 시간을 만들려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