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알고리즘은 오늘도 도파민을 자극하는 수많은 '썰'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중에서도 자기 인생을 자기가 꼬는 이야기는 반응이 뜨겁다. 모두가 뜯어 말리는 연애를 지속하는 사람, 각종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 관중은 조언의 탈을 쓴 분노의 댓글을 쏟아낸다. 그리고 은밀하게 생각한다. '내가 저거보단 낫지.'
연극 <플리백>은 이런 썰에서 볼 법한 여자 '플리백'의 이야기다. 작품은 플리백이 면접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는 친구 '부'와 기니피그 카페를 운영했지만 연인의 불륜을 알게 된 친구가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모호한 죽음을 맞고, 카페는 손님이 줄어 문을 닫지 않으려면 당장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다.
여성 배우 혼자서 90분 내내 이끌어가는 연극 속에서 플리백이라는 인물은 문제투성이, 누추한 곳, 잡동사니라는 '플리백'의 뜻처럼 부적절한 언행으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플리백은 쉴 새 없이 성적인 농담을 내뱉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남자친구 해리를 두고도 여기저기 연락해 다른 사람과의 일회성 만남을 지속한다.
언뜻 보면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진보적인 여성상으로 보이지만, 선택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 되는 데 집착한다는 점에서 그는 여성주의 아이콘처럼 해석되기를 거부한다. 지하철에서 처음 만난 남자가 자신과 자지 않는다고 분노하며, 페스티벌에서 인사불성이 된 자신을 텐트에 데려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남자를 험담한다. 형부가 언니를 때릴까 봐 걱정하면서도 형부는 그런 '섹시한' 일은 하지 못할 거라며 혼잣말을 해버리는 여자가 바로 플리백이다.
관객의 불편함은 친구 부의 연인과 바람을 펴서 부의 죽음을 초래한 사람이 다름 아닌 플리백 자신이라는 점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내가 저거보단 낫지'의 '저거' 같은 사람, 누구나 마음 놓고 욕할 만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플리백은 정말 마음껏 욕먹어 마땅한 사람인가. 아무렇지 않은 척 쾌활하게 늘어놓는 이야기 속에서 관객은 플리백의 그림자를 본다. 엄마의 죽음 이후 가족 관계가 소홀해진 상태에서 특출난 능력도 기댈 언덕도 없는 그에게 섹스란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행위이자 도피 수단이다. 비난하기 전에 생각해보면, 해롭지만 잠깐의 안도감을 주는 행위에 중독되고, 집착하고, 이러지 말아야지 다짐했다가도 다시 해로운 습관으로 돌아가는 굴레는 그 대상과 정도가 다를 뿐 현대인이라면 익숙한 악순환이다.
게다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내포된 모순이 계속 플리백을 따라다닌다. 욕망당할 만큼 매력적이여야 여성으로 인정받지만, 그렇다고 암묵적인 선을 넘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박탈당하는 세상에서 플리백은 '문란한 여자'로 낙인 찍힌 존재다. 형부에게 추행당한 사실을 폭로하지만 언니가 믿어주지 않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플리백은 고립되고, 자기파괴에 가속이 붙는다.
관객은 연극을 보며 저 사람이 정신을 차리기를, 문제가 해결되어서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지기를 바란다. 원래 이야기란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러나 그 기대가 무색하게 플리백은 부가 남긴 기니피그까지 죽게 만들고, 돈을 준다던 언니는 마음을 바꾼다. 유일하게 목적 없이 친절했던 단골손님 '조'에게까지 자신의 밑바닥을 보여준 플리백은 절망한다.

이 극에서 조라는 인물이 흥미롭다. 플리백이 관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조도 저녁이면 술집에서 이야기꾼이 된다. 플리백에 따르면 뻔하다지만, 그의 이야기는 술집에서 술을 얻어 마실 정도로 큰 호응을 얻는다.
그러나 연극을 보는 관객은 플리백의 이야기에 술집 사람들처럼 호응할 수가 없다. 조의 이야기가 선량한 주인공이 시련 끝에 행복을 찾는 '적절한' 이야기라면, 플리백의 이야기는 도덕적으로 결함 있는 주인공이 스스로 제 인생을 꼬는 '부적절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플리백은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끝맺을까.
연극은 다시 면접장으로 돌아온다. 면접관은 플리백이 무심코 털어놓은 진심에 마음을 열고, 그에게 다시 면접 볼 기회를 둔다.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걸까? 이제부터 관객이 내내 기대하던 바로 그 장면이 펼쳐지는 걸까? 플리백은 그 기대를 비웃듯 그저 가운데손가락을 치켜세울 뿐이다. 나한테 그럴듯한, 적절한 이야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듯이. 내 인생은 너에게 감동이나 깨달음 따위를 주거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플리백은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죄책감과 충동으로 계속해서 자기파괴의 길을 걸어갈 수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도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플리백이 퇴장한 자리에 관객만 남는다. 누군가의 인생을 마음껏 평가하고 '감상'한 다음, 조의 이야기보다는 플리백의 이야기에 가까운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