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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내게도 돌아갈 곳이 있다

겨울 사찰 여행기

by 김효주 에디터
2026.02.15 14:00

 

 

1월에 버킷리스트를 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 버킷리스트는 미래의 소망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옮겨 적은 목록이구나. 특히 ‘눈 덮인 겨울날 사찰에 가고 싶다’라는 항목은 언젠가 이뤄도 되는 꿈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 실행에 옮겼다.


원하는 게 생기면 일단 밀어붙이는 성격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마침 일이 많지 않았던 시기라 연차를 내고 전남 광양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내려갔다. 자연 속 사찰에 가고 싶다는 내 말에, 아버지는 3일 동안 세 곳의 사찰을 차례로 데려다주셨다.

 

 

 

구례 사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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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우리는 구례 사성암에 갔다. 사성암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사찰이 박혀 있는 듯한 모습이다.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이런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언덕 끝에 다다르자, 절벽과 사찰이 맞물린 장면이 한순간 눈앞에 펼쳐졌다. 그 모습은 ‘절’이라기보다 하나의 구조물 같았다.

 

사성암은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의상대사, 네 명의 고승이 수도한 곳이라 그 이름이 붙었고, 단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사찰이라고 한다. 약사전에 오르면 구례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네 개의 굵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사찰 위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그 아래 펼쳐진 마을과 하늘은 그 어떤 곳보다 평안하고 또 평화로워 보였다.

 

 

 

여수 향일암


 

다음 날에는 나의 ‘최애’ 사찰인 향일암을 찾았다. 향일암은 사성암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갖는 곳이다. 이미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지만, 이전에는 여름에 다녀갔던 터라 이번에는 겨울의 향일암이 보고 싶었다.


향일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전히 험했다. 수많은 계단 길과 비교적 완만한 언덕길, 두 가지 선택지가 있지만 이번에는 계단을 택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오르다 보면 해탈문에 닿는다. 거대한 바위틈 사이로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 있고, 그 길을 지나야 비로소 사찰이 나타난다.

 

이곳은 도착하기까지의 과정마저도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향일암 최종.jpeg

 

 

향일암의 진짜 풍경은 대웅전 앞마당에서 완성된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거북머리와 작은 밤섬. 오래 바라보다가 뒤를 돌면, 이상하게도 바로 다시 보고 싶어진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게다가 겨울의 향일암은 내가 알던 향일암과 또 달랐다. 푸른 바다 위로 펼쳐진 무지갯빛 하늘, 잎을 모두 떨군 나뭇가지, 허공을 가르는 새들까지. 계절이 바뀌자 같은 장소도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무엇 하나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장면이었다.

 

 

 

순천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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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향일암이 주는 감동을 뒤로하고,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송광사에 갔다. 여태 가본 사찰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고, 마치 산 속에 있는 하나의 마을 같았다. 마침 여러 스님께서 대웅보전에서 나오고 계셨는데, 연장자부터 막내 스님까지 조용히 한 줄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유독 인상 깊게 남았다. 말없이 움직이는 그 행렬을 보며, 이 공간에 쌓여온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을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다.


송광사 한편에서는 법보시라고 하여 무료로 법륜 도서를 제공하고 있었다. <죽음은 두려운 것인가>와 <마음, 과연 무엇인가> 중 후자의 책을 꺼냈다. 인상적인 구절이 있어 적어본다.


 

감각적 지각에서 벗어난 사람

그에게는 더 이상 굴레가 없다.

지혜로 해탈을 성취한 사람

모든 미망이 그에게서 사라진다.

그러나 감각적 지각에

또 삿되고 그릇된 관점에 집착하는 사람

그는 이 세상을 아웅다웅 다투며 산다.

 

- <마음, 과연 무엇인가> 中

 

 

자연을 품은 사찰에서 이런 구절을 읽으니 왜 내가 굳이 겨울에 사찰을 찾고 싶어 했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연을 품은 사찰에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는다. 속세의 번뇌가 갑자기 작아 보이고, 그동안 붙잡고 있던 고민이 실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장소에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 나는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뒤늦게 알게 된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단순히 사찰을 몇 곳 다녀온 일정으로 남지 않았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내게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광양으로 내려간다는 건 내게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자연과 바다, 사찰, 그리고 아버지가 있다. 나는 그 지역에서 살아본 적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은 나의 뿌리를 품고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번 여행은 단순히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러 간 시간이었지만, 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풍경이 아니라 돌아갈 수 있다는 감각을 보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감각이 지금의 나를 다시 달리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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