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안녕, 다녀왔어

글 입력 2022.12.2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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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와 나


 

얼마 전, 일이 있어 학교를 방문했다. 졸업한 이후로는 들린 적이 없으니 거의 1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학교는 퍽 낯설었다. 코로나19로 한산하던 거리엔 다시 사람들이 들어찼고, 처음 보는 간판과 건물들이 내 추억을 덧칠했다.


7년 전 사촌 누나의 손에 이끌려 처음 이곳에 방문했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이곳이 앞으로 네가 다니게 될 학교야. 어쩌면 그녀도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나보다 6년 먼저 이 학교를 다녔던 누나의 한쪽 눈엔 반가움이, 다른 눈엔 아쉬움이 어려 있었다. 아직 변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반가움과 이미 변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 그것들은 한데 모여 사람으로 하여금 대상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A에게 연락했다. 마침 둘 다 한가했고, 배도 고팠다. 식당을 찾아 이 골목, 저 골목을 어슬렁거리는데 낯선 간판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학생 때 자주 갔던 식당들은 망해버렸는지 보이질 않았다. 결국 별 수없이 아무 식당에 들어가 부대찌개와 제육볶음을 시켰다. 서로의 근황을 전하며 밥을 먹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A와 내가 서로 알고 지낸지 햇수로 벌써 14년이라는 것이었다. 내 생애 딱 절반만큼의 시간이었다.


14살부터 2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까지. 질기다면 질긴 인연이었다. 작은 도시의 중학교에서 처음 만났고,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과는 달랐지만 대학교도 같았다. A는 졸업 후 대학원을 선택했고, 나는 휴학 후 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서로 학교 근처를 떠나진 않았으니, 계속 붙어 다녔던 셈이었다(심지어 A와 나의 자취방은 같은 빌라에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 내가 졸업을 하고 회사 근처로 집을 옮기면서 처음 우리는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로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계절도 돌고 돌아, 다시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 오랜만에 들린 학교는 반갑기보단 어색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그곳에서 나는 외부인이었다. 그런 와중에 A와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저 만났을 뿐인데 나의 시간은 20살 때로, 17살 때로, 14살 때로 돌아갔다. 그 모든 순간에 A는 항상 거기 있었다. 내가 가끔씩 그리워하고, 때론 돌아가고 싶어 했던 그때, 그곳에 A는 늘 존재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A가 참 고마웠다. 그 애가 있어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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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들에겐 돌아올 곳이 필요해


 

강풀의 웹툰 <당신의 모든 순간>은 좀비 아포칼립스가 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중 주인공 ‘정욱’은 좀비 사태 이후 실종되었던 형과 오랜만에 재회한다. 물론 그의 형은 이미 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돌아오겠다는 마지막 기억을 반복하며 동생이 있는 집으로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이후 정욱은 어쩌면 좀비들이 이 주변을 맴도는 이유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들의 바램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고생 끝에 좀비들을 집에 데려다준다. 허나 무의미한 일이었을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좀비들은 다시 밖으로 나와 구슬프게 울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정욱은 마침내 깨닫는다. “꼭 돌아올게.” 그의 형은 집에 돌아온 게 아니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다녀왔어.” 그 말을 좋아한다. 그 말엔 어린 시절,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 아버지를 비몽사몽한 채로 배웅하던 기억이 담겨 있다.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날, 어머니가 비상금이라며 가방 속에 찔러 준 천 원짜리 지폐가 담겨 있다. 군대에서 처음 휴가를 나온 날, 오랜만에 재회했던 그 사람의 미소가 담겨 있다. 전역하던 날 집으로 돌아온 나를 안아주었던 아버지의 온기가 담겨 있다. 별거 아닌 그 말에 참 많은 기억들이 담겨 있다. 덕분에 그 말은 내게 늘 힘이 되었다.


‘다녀왔어’라는 말에는 돌아갈 곳이 있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언제든지 당신을 반갑게 맞이해줄 수 있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당신의 삶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사실은 의외로 살아가면서 꽤나 큰 힘이 된다.


만약 돌아갈 곳이 없다면 사람들은 방황한다. 자기 자리를 잃고, 끝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외롭고 쓸쓸하게, 마치 <당신의 모든 순간>의 좀비들처럼 죽은 시간 속을 부유한다. 언젠가 소방서에서 잠시 일했을 때 틈만 나면 죽고 싶다고 전화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때마다 우린 그를 달래어 집에 돌려보냈다. 함께 사는 가족들은 몇 번이나 반복된 이 소란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오죽하면 함께 사는 가족들 대신에 멀리 산다는 삼촌이 와서 남자를 달랠 정도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근무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만난 다른 구급대원으로부터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의 신고는 엄포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구조요청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 죽고 싶은 사람들은 신고하지 않는다. 살고 싶은 사람이 신고한다. 그날 밤 내가 만났던 남자에겐 집과 가족이 있었지만 그곳은 남자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구나. 걱정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남자는 119를 찾았나 보다.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죽고 싶다는 말로 살려달라고 외쳤나 보다.


사람들에겐 돌아올 곳이 필요하다. 그건 학교나 집처럼 물리적인 장소일 수도, 가족이나 연인, 친구처럼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도 될 수 있다. 추억처럼 형태가 없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이든 괜찮다. 분명한 건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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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녕, 다녀왔어


 

지난 크리스마스에 A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는 나에게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가 들어간 곳은 D시에 있는 회사였다. 지난 겨울에 내가 학교를 떠났다면, 이번엔 A가 떠날 차례였다.


나는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한편으론 씁쓸한 마음도 있었다. D시라면 이곳에서 KTX를 타도 2시간은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아마 앞으로는 지금처럼 A를 자주 만나긴 쉽지 않을 것이다. 10대 초반에 함께 맞이했던 시간은 20대 후반에 각자의 영역으로 이렇게 저물어 갔다. 다음에 만나서 밥이나 먹자는 실없는 약속을 끝으로 통화는 끊겼다. 그동안 고마웠어. 미처 건네지 못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편 요즘 나는 이사를 위해 부동산을 돌아다니고 있다. 돌이켜 보면 어렸을 때부터 나만의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긴 했었다. 누군가는 남자라면 차를 먼저 사야 한다고 내게 열변을 토하기도 했지만 그다지 공감이 가진 않았다. 운전을 잘하는 편도 아니었고, 애초에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집은 달랐다. 예전처럼 단순히 자취에 대한 로망 때문만은 아니다. 집은 본질적으로 공간이다. 공간의 진정한 가치는 그 안에 무엇을 채워 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건 독립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사랑받는 삶에서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동안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지난 겨울, 새해를 맞이하며 내가 세운 목표는 무사히 스물여덟이 되는 것이었다. 거기엔 A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덕분에 내겐 늘 돌아올 곳이 있었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젠 내 차례다. 그동안 그들이 그래주었듯, 이번엔 내가 먼저 다녀왔냐고 말을 건넬 차례다.


 

“안녕, 다녀왔어?”

“안녕, 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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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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