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서가명강’
서울대생이 부러웠던 적이 한 번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연달아 읽던 시기였다. 성장하느라 정신없이 성장소설을 붙잡고 있던 때, 서울대 홍진호 교수님의 헤르만 헤세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왜 나는 그토록 헤세의 소설이 필요했는지, 『데미안』에서 『싯다르타』까지 사람들이 왜 그를 끊임없이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잔잔히 남아 있다. 아쉽게도 강연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이 흐릿해졌지만, 그때 느꼈던 울림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왜 서울대 학생들이 부러웠을까. 단지 학교의 이름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고, 누군가와 그 답을 함께 찾아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시절의 나는 헤세의 문장을 붙잡고 있었고, 동시에 누군가의 해설을 통해 그 문장 너머를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서가명강] 시리즈가 꽂힌 책장을 발견했다. 제목들을 훑어보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서가명강]은 “서울대에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라는 뜻을 담은 시리즈다. 서울대생들이 직접 뽑은 인기 강의를 책으로 엮어, 전공을 넘나드는 융합적 주제와 실용적 지식을 담아낸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어렵지 않은 분량과 부담 없는 크기였다. 짧지만 밀도 있는 강의를 읽는 느낌. 관심사가 많은 나에게는 ‘하나씩 차근히 탐구해 볼 수 있는 작은 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고른 첫 책은 『우리에게는 헌법이 있다』, 두 번째 책은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이었다.
두 권을 읽고 나니, 앞으로 읽을 책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든든해졌다. 이 시리즈가 내게 어떤 생각을 남겼는지, 그중 두 권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려 한다.
『우리에게는 헌법이 있다』
"당신의 행복을 지키는 대한민국 헌법 특강"
"우리는 꽤 괜찮은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헌법, 나와 당신을 지켜주는 힘"
이 책의 저자는 14년간 검사로 활동한 뒤 현재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효원 교수다. 로스쿨 체제로 전환된 이후, 강의실에서 헌법을 깊이 있게 다룰 기회가 줄어든 것이 아쉬웠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아쉬움에서 출발한, 헌법을 다시 삶의 언어로 풀어낸 강의다. 책은 국민주권, 법치국가, 자유민주주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네 가지 축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구조를 설명한다. 제목만 보면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막상 읽다 보니 전혀 다른 감정이 들었다. 법은 늘 나를 규제하는 규칙이라고 생각해왔다. 지켜야 할 것, 어기면 처벌받는 것.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법이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헌법 안에는 ‘행복’, ‘존엄’, ‘가치’, ‘자유’ 같은 단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회가 잘 굴러가기 위해 존재하는 규범이라고만 여겼던 법이, 사실은 한 사람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약속이라는 점이 새롭게 다가왔다.
“사람은 존엄과 가치를 통해 자유로울 때만 행복할 수 있고, 자유는 그 행복을 증진시킨다”
이 문장을 읽으며 잠시 멈췄다. 내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유가, 사실은 누군가의 오랜 논쟁과 합의 끝에 마련된 틀 안에서 보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내가 매일 애써 지키고 있는 ‘성실함’과 ‘책임’ 역시 그 틀 안에서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 역시 간결하게 설명한다. 쉽게 풀어쓴다는 의미보다는, 핵심을 흐리지 않고 단단하게 정리해두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서로 다른 능력에 따라 일하고, 분배는 필요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인간 본성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멈춰 생각하기도 했다. 헌법은 단지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워진 구조라는 점을 이 책은 잔잔히 보여준다. 읽고 나니, ‘우리는 꽤 괜찮은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조금은 다르게 들렸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합의하려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내 안의 힘을 발견하는 철학 수업"
"사랑만이 우리를 불안과 절망에서 구원한다"
내 안의 잠재된 능력을 깨우는 에리히 프롬의 제언"
이 책은 20세기 사상가 에리히 프롬의 사상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낸 강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로 잘 알려진 그는 인간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자유의 문제를 평생 탐구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다. 저자 박찬국 교수는 프롬의 사상을 단순히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되었는지까지 함께 보여준다. 프롬은 책 속에만 머문 사상가가 아니라, 자신의 사유를 삶에 적용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프롬은 종종 ‘사랑의 예언자’라 불린다. 그는 사랑을 감정이 누군가를 소유하거나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사랑은 불안을 잠시 덮어주는 위로가 아니라,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어떤 사람이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 여부는 그 사람이 얼마나 인격적으로 성숙해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의존성, 이기심, 타인을 착취하려는 욕망을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잠시 멈춰 섰다. 사랑은 누군가를 붙잡는 감정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성숙해지는 과정이라는 말이 오래 남았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단단해졌는지, 아니면 더 불안해졌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사랑이 불안을 줄여주길 기대했던 적은 없었는지, 오히려 그 불안을 상대에게 떠넘기려 하지는 않았는지 조용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프롬은 또 말한다. 인간은 ‘소유 양식’이 아니라 ‘존재양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더 많이 가지는 삶이 아니라, 더 깊이 존재하는 삶. 자발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적 행위이며, 그런 삶이 곧 예술이라고 말한다.
“자발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창조적인 행위라는 의미에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사랑이 꼭 연인 사이의 감정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대한 태도, 사람을 대하는 마음,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 역시 사랑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불안을 없애는 방법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나니, ‘불안’이라는 단어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불안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내가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지점을 알려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서가명강]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을 핵심 개념들을 정리해 준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헌법이 있다』는 ‘자인과 졸렌’, ‘국가 권력’, ‘사회계약설’, ‘대의제’와 같은 용어를 먼저 짚어준다. 낯설 수 있는 개념들을 미리 건네받고 읽기 시작하니, 헌법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역시 철학을 설명하기에 앞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인문학, 철학이라는 학문의 도표를 먼저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사랑’, ‘소외’, ‘실존적 욕망’, ‘소유 양식’, 존재양식’ 같은 핵심 단어들을 안내한다. 단어를 먼저 이해한 뒤 프롬의 사상을 따라가니, 말하고자 했던 정의와 결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이 시리즈가 좋은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막연하게 어렵게 느껴지는 주제를 곧바로 설명하기보다, 생각의 길을 잃지 않도록 작은 표지판을 먼저 세워둔다. 덕분에 나는 지식을 소비하는 독자가 아니라, 천천히 따라가는 청자 혹은 학생이 된다. 강의실에 앉아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때처럼,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 [서가명강]은 나에게 ‘지적 공간’을 다시 열어주는 작은 통로 같아 다음 시리즈들도 기대가 많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