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메뉴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게 직장인에게는 나름의 권력이다. 출퇴근길은 반의반 평 남짓이라 책은커녕 발을 둘 자리가 없고, 일찍 일어나거나 늦게 잘 자신은 더더욱 없다. 유일한 낙은 점심시간, 외투 품에 책 한 권을 숨겨 외진 카페 구석을 찾는 일이다. 날이 추운 탓도 있지만, 한 장이라도 더 넘기고자 종종걸음으로 달린다. 삶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야 뻔하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고통에 몸서리친다. 오늘의 추위 같은 것에도 말이다. 그러니 언제는 안 추웠냐는 물음은 무의미한 것이다.
최승자의 시에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문장이 많다. 어느 때보다 얇은 두께에도 넉넉히 챙긴 인덱스가 금방 동난다. 왜 그런 대목이 많은가 했더니 출처가 같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내 청춘의 영원한」
이렇게 나 하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강남 한복판에서 분주하게 최승자와 그의 시를 만난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다시 그 반의반 평에서 ‘쉬었음 청년’에 대한 지겨운 글을 읽는다. 그 단어가 밉고 싫다. 쉬는 이유가 각자가 다르겠지만, 자발적으로 쉼을 선택하고 누린 사람들을 가리키고자 붙여진 이름일 리 없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실업자고 구직 단념자다.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모르는 쉼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과장하지 않고, 비약하지 않고는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어졌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일찍이 나는」 中
최승자가 남긴 오물들은 ‘더러워서 피하’고 싶은 종류는 아니다. 그건 최승자이며, 동시에 나의 것이기도 하다. 애써 덮어버리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처치를 바란 것이 아니다. 혼모노(本物), 진짜가 보고 싶다. 예컨대 최승자의 시는 진짜 추움이다. 진짜 배고픔이다. 가난이다. 혼모노다. 자백이다. 여느 때와 같은 무료함 속에 나온 추임새는 아니다.
그러나 툭하고 터져버린 속내만큼이나 날것이다.
깨고 싶어
부수고 싶어
울부짖고 싶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고 싶어
까무러쳤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
「나의 詩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詩」 中
더 이상의 이상(理想)도 사유도 없다. 이대로 괜찮은데, 괜찮아도 괜찮은가 싶은 순간이 이따금 찾아온다. 힘은 뺀다고 뺐는데, 너무 게으른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청년이 힘들고, 나라가 힘들고, 세상이 힘든데, 이상하리 조용한 하루가 부끄럽다. 작년에도 봄을 준비한다더니 초여름이 다 되어서야 움찔했는데, 올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수동적인 삶에 맛 들려 이대로 모든 게 끝나기엔 아직 젊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하는 일이라곤 이 젊음을 낭비하는 것 정도다. 무엇이 그리움이던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일이 외로움이었는지, 그리움이었는지, 괴로움인지 잊은 지 오래다. 그 무한한 트라이앵글을 돌다 잠이 든다. 이상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아침은 온다.
바라는 것이라고는 책을 펼칠 단 한 평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