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스텔라가 개봉했을 때였다. 그 영화는 내게 SF라기보다 부녀의 휴먼 드라마에 가까운 인상을 남겼다. 복잡한 과학 이론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 영화를 충분히 감정적으로 이해했다고 느꼈고 다음 날 친구들에게 영화가 참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무리 중 한 명이 차갑게 물었다. “너는 이해했어?” 당시에는 그 질문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굳이 영화의 후기가 이해와 해석만의 영역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누구나 인터스텔라를 이해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그것은 과학적 이해가 아니라 감정적 이해였다. 다만 친구는 내게 바로 그 정확성을 묻고 있었을 것이다. 즉, 만든 이의 의도를 얼마나 ‘정확히’ 파악했는지를.
그 발상이 물론 대단히 낯설지는 않다. 대한민국의 청소년으로 자라면서 화자 또는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는 (궁극적으로는 출제자의 의도를) 일은 익숙하다. 그리고 그 해석을 틀렸을 때 느끼는 박탈감 또한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제는 세상의 의미를 투영한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어서 완성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친구가 했던, 평론가들에게 대중이 기대하는 식의 해독을 원하는 욕망이 어쩌면 참 오랫동안 새겨져 온 교육의 그림자로도 느껴진다. 하지만 개인의 창작 작품에 일정한 배경을 과도하게 투영해 해석하는 일이 더 이상 좋은 해석과 비평의 영역은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이 기억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왜 『해석에 반하여』를 읽으며 10년도 더 된 기억이 떠올랐는지 생각한다. 십 대들의 화장실도 함께 가는 의리가 영화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충격이었을까. 어쨌든 이 작은 경험이 십 대부터 지금까지 예술에 관한 나의 해석을 말하지 않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손택이 말하는 해석의 맹점과 환상은 그 찝찝한 기억을 개운하게 박살 내주었다. 그는 내용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해석은 영원히 완결되지 않는 한없는 프로젝트가 된다. 또한 역으로 예술 작품을 해석하려고 접근하는 습관이, 예술 작품에는 내용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는 환상을 지속시킨다. 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고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예술의 아름다움을 언어화하지 못하면 바로 탈락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 같은 공간 (전시회, 공연장 등)에서 느낀 예술이 성역화 되어가는 기분을 손택이 퇴치해 준다.
*
좋아하는 영화의 불호 후기를 찾아보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프로그램의 명처럼 나는 세상에 나쁜 후기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열한 비난은 후기로 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기에 평론과 해석이라는 이름이 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슬프지만 그것에 영향받는 독자와 시청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해석을 나의 해석보다 옳다고 믿게 되는 건 온전히 독자의 문제는 아니다. 손택이 끊임없이 경계하는 과대평가와 해석이 우리에게는 기본값처럼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단적이고 일방적인 믿음 말이다. 물론 이것은 독자만이 아닌 평론가로 통칭되는 이들에게도 마냥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답답함에 대해 『해석에 반하여』 에서는 끊임없이 아니라고 소리친다.
그렇다면 좋은 해석을 기반으로 한 좋은 비평이란 무엇일까. 손택의 말을 빌리면 이상적인 비평이란 작품의 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그 작품에 봉사하는 비평의 모습이다.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평론들이 두 번째 챕터부터 이어진다. 손택의 비평은 해석보다는 해설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에 대한 풍부한 정보와 전작들과의 유기성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렇지만 그의 해설이 그저 단편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현실과 진득하게 붙어 있는 통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손택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보다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에 대해, 작품에 대해 개인의 역사를 촘촘히 이어가는 그 글들이 수전 손택이 말하는 비평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곳곳에 튀어나오는 그 매서운 독창성이 독자를 경탄하게 만든다.
어쩌면 현실 감각이 더 깊어지고 상상력이 확장되는 것만큼 진실이 절실하지 않은 시대도 있는 듯하다. 일단 나는, 세상에 대한 제정신인 시작이 진정한 시각임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진실을 원하던가? 진실에 대한 요구는 일정하지 않다. 휴식에 대한 요구가 그러하듯. 왜곡된 생각이 진실보다 더 큰 지적 돌파력을 가질 수도 있고 변화하는 정신의 요구에 더 잘 봉사할 수도 있다. 진실은 균형이지만 진실의 반대인 불균형은 거짓이 아닐 수 있다.
**
예술 비평의 목적은 예술 작품을(또한 그러면서 우리의 경험을) 더욱 생생한 것으로(그 반대가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비평의 기능은 그것이 어떻게 그런지를 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손택의 말이 단지 예술 향유자와 비평가를 완전히 분리해 전하는 말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미 모든 것의 과잉 시대에 도달한 채 (이미 1965년의 손택이 과잉이라 일컫는다) 각자의 해석을 해야 하는 시대에서 그가 말하는 제대로 보는 일이 더욱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특히 누구나 생산하고 배급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소비와 창작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유명 비평가의 글보다 누군가 개인 블로그에 쓴 영화 후기를 더 좋아하게 되기도 하고, 한 브이로거의 영상을 시트콤처럼 함께 틀어놓기도 한다. 개인에 미치는 개인의 영향은 어쩌면 점점 더 막대해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를 해설해 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 모습을 들여다보면 손택이 말하는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이 이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그 과정들이 탈권위를 향해 가는 21세기의 비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우리는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끼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이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해석의 아름다움과 존재 이유는 다름에서 온다. 우리의 삶이 다른 만큼, 각자의 역사에 색채만큼이나 해석의 여지는 충분히 존재한다. 그 다양성과 호불호의 아름다움을 수전 손택의 글이 여전히 시사한다는 점이, 세월을 타지 않는 동시대성이 놀랍다. 그의 말이 곧 과거를 말하고 우리를 말하고 그 다음의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해석에 반하여』 는 수전 손택의 비평 에세이 26편을 담았다. 1965년에 쓰인 글이 여전히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가는데 신선한 시야를 제시한다는 사실에서 그가 얼마나 훌륭한 작가이었는지 실감하게 한다. 우리가 예술을 덜 설명하고, 더 많이 느껴도 괜찮다는 손택 식의 격려를 의미를 찾다가 길을 잃은 것 같은 창작자에게 그리고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에게 적극 권유한다. 그의 글을 새로운 번역으로 읽으며 우리가 정보 과잉 시대에서 어떤 태도로 예술과 삶을 느껴야 하는지 깨닫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