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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순백의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는 '여행과 나날' [영화]

막다른 골목에 갇힌 당신에게 건네는 영화

by 한소현 에디터
2026.01.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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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필자의 개인적인 관점이 들어간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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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이’는 벤조와의 여정 끝에 “이렇게 즐거웠던 건 오랜만이에요.” 하고 탄복한 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가슴을 뛰는 영화를 만나 감탄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영화관에서 보길 잘했다는 안도감과 내 존재에 대한 안도감. 씨네21 인터뷰에서 심은경 배우는 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 안에서 나의 순간순간이 보였다.
 

 

나의 안도감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영화가 내어준 여백의 자리에 나를 채우고, 주인공 ‘이’의 걸음을 따라가니 그 끝에는 설국의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서 벗어나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행과 나날’은 ‘여행’과 ‘나날=일상’이라는 대비되는 단어를 ‘과’라는 조사로 연결하는 영화다. 언어는 보통 이항대립 패턴을 적용해 의미를 만들어내곤 하는데, 이때 드러나는 한계는 언어에 의해 생성되는 고정관념이다. 이것을 영화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말에 갇히는 것’이다.

 

각본가이자 주인공 ‘이’는 좁은 방에 앉아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늘 어김없이 말에 붙들리고 만다. 나는 말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럼 문득 궁금해진다. 말에 갇히는 것은 무엇이며, 말에서 해방되는 것은 무엇인지.

 

미야케 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비일상과 일상’ , ‘영화 속 세계와 일상 세계’와 같은 정반대의 것을 영화에 배치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본편은 대비되는 단어들의 향연을 보여준다. 우선 영화의 구조에서 시작하자면 ‘이’가 쓴 시나리오를 극중극 형태로 보여주는 1부와, 여행을 떠난 ‘이’의 여정을 따라가는 2부로 구분된다. 1부의 공간적 배경은 여름과 바다, 2부는 겨울과 산이다. 더불어 1부와 2부는 생과 죽음을 다루는 에피소드(은사의 죽음과 쌍둥이 동생의 등장)를 통해 연결된다. 이외에도 대립하는 것을 나열해 보자면, 여행과 일상,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 빛과 어둠, 낮과 밤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토록 수많은 단어들이 종이 위에 물감을 칠하듯 서로 스며들게 한다는 점에서 비범해진다. 축약하면 두 단어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한 쇼트 안에 담기기도 하는데 1부, 언덕 위의 롱테이크 장면이 그러하다.

 

언덕 위의 두 남녀는 노을이 지고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대화를 나눈다. 붉은빛 노을로 가득했던 프레임이 영화관의 어둠으로 서서히 스며 들고나면 빛과 어둠, 스크린과 영화관의 경계도 허물어진다. 말로 정의하면 섞일 수 없는 것이 한 쇼트에 담기면, 하나가 된다. 이렇듯 말이 지워진 세계 속에 놓인 관객은 자유로이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 넣는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말에서 해방되는 것’이란 단순히 말의 경계를 흩트리는 것이 아니다. 말에서 도망친 '이'가 여행의 끝에서 볼펜을 쥐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름과 겨울 그리고 여름과 겨울에 대한 수많은 관념들은 ‘이’를 잡아둘 테지만, ‘이’가 직접 겪은 ‘겨울’은 ‘이’만의 것이니까. 그래서 영화는 세상의 언어에 갇히지 않고 직접 몸으로 겪어낸 언어를 쓰기를, 조금은 후련한 표정으로 극장을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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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 이탈하기


 

'원래의 나'에서 벗어난 낯선 경험들이 꽉 막혀 있던 터널을 뚫는 열쇠가 되곤 한다. 나 또한 꿈, 소중한 인연, 잊지 못할 여행을 일상에서 벗어난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궤도에서 이탈하는 경험은 나아갈 힘을 준다.

 

사실 ‘이’의 꿈같은 여정도 경로 이탈에서 시작된 것이다. 아무 계획도 없이 방문한 조용한 마을에서 '이'는 머물 곳을 찾지만 모두 만실이다. 결국 도움을 받아 ‘이’가 찾아간 곳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상상의 공간, 벤조의 작은 여관이다. 만약 ‘이’가 여행을 계획했다면 혹은 숙소를 미리 예약했다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그곳에서 새로운 나날이 펼쳐진다.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소 냉소와 적막 속에서 이어진 영화는 이 지점에서 유머 한 스푼을 추가한다. 의도치 않게 잉어 서리의 공범이 된 ‘이’, 그리고 얼어 죽은 잉어를 발견한 벤조와 이의 표정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일상의 작은 변주 속에서 평온을 찾은 ‘이’의 얼굴은 1부의 소년, 소녀의 위태로운 얼굴과 다르다. (1부가 여행을 떠나기 전 ‘이’의 모습이라 해석한다면) 보이지 않는 물고기를 찾아 헤엄치던 ‘이’는 여행의 끝에서 귀한 비단잉어를 꼭꼭 씹으며 포만감을 느낀다. 동일한 죽음의 이미지가 서로 다른 인상을 남기듯, '이'에게 생긴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행과 나날’은 말을 지운 순백의 눈밭에 ‘이’의 발자국을 남기는 영화다. ‘이’가 마지막에 보여준 씩씩한 걸음처럼, 큰 언어에 갇히지 않는 자신의 언어를 묵묵히 써 내려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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