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후 돌아오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다음 편까지 3개월이 넘게 걸린 ‘롱폼의 삶 도전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 현황을 보고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이로비의 삶
기운차게 스페인어 공부를 선언한 것에는 수많은 사례가 나름 기반이 되었다. 일과 자격증 공부를 병행하는 유튜버들이나 여타 인플루언서들이 얼마나 많은지, 관심이 크게 없는 사람도 알 것이다. 9 to 6 근무를 하면서도 점심시간, 퇴근 후 이동시간, 저녁 식사 이후 취침 전까지의 시간에 알뜰하게 공부하던 영상을 너무 많이 보니 내 상황으로의 적용이 만만하게 보였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 어렵더라. 8시까지 출근해서 정신없이 하루를 ‘근무’하고 나면 어느덧 4시 반, 그리고 퇴근하면 5시.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은데 무지막지하게 피곤한 시간이 찾아온다. 체력 회복을 핑계로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다 보면 또 6시, 아차! 싶어 서둘러 저녁을 해 먹으면 8시(요리를 조금 오래 하는 편이다). 으악! 이제 씻고 빨리 잠에 들어야 내일의 8시 출근을 성공시킬 수 있다. 물론 짬짬이 숏폼의 삶도 충실히 살아줘야 하고 말이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석 달이 지나갔다. 계약보다 일찍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고, 그 때문에 인수인계로 워낙 바쁘기도 했다. 돌아오려니 만나야 할 사람도, 해치워야 할 일도 많아 느긋한 롱폼보단 무언가 많이 압축한 숏폼의 삶을 살았다 할 수 있겠다. 정신없는 하반기였어!
그래도 시험은 잘 봤어요
늦게 돌아온 것에는 매우 느리게 발표된 스페인어 시험(DELE) 결과도 일정 지분을 차지한다. 분명 5월에 봤는데, 9월에서야 결과를 받아보다니, 역시 시에스타(낮잠)의 나라답게 느린 행정 처리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험은 합격했다. 며칠이고 redit을 뒤적이면서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초조해했다. 어느 날 새벽에서야 겨우 확인할 수 있었던 ‘APTO(합격)’에 얼마나 기뻤는지! 합/불합격 발표보다 더욱 늦게 발표된 성적은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합격 기준 안이었지만, 그래도 합격한 게 어딘가! 부랴부랴 벼락치기 했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물론, 이건 순전히 벼락치기의 덕이고 나 자신의 순수 실력은 A2는커녕 A1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이를 위해 또 다른 롱폼을 기획했다. 이번 학기 대차게 스페인어 중급 강의를 수강 신청했다. 벌써 수업 시간마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모쪼록 내 선택에 후회가 없길 빈다.
수면이 부족해
‘롱폼의 삶’ 프로젝트를 생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건 일정한 수면시간의 확보다. 이르게는 9시부터 늦게는 3~4시까지, 오락가락하는 취침 시각을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주 내로 고정하는 게 큰 목표였는데, 6~7월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게 지켜지던 것이 귀국을 준비하며 손쓸 수 없이 망가졌다. 9월,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시차 적응이라는 명목으로 고무줄 같은 수면시간을 유지하는 중이다. 수면시간과 함께 이어지던 ‘나이트 루틴’도 망가진 상태다. 곧바로 복학해 학기를 다니고 있는 터라, 아직 짐 정리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현실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온다. 벌써 보름이나 지났다니! 일 났다, 그래.
숏폼이 바보의 삶은 아니잖아
처참한 실행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에 임하는 내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아이 뭐, 좀 게으르면 어때!”라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프로젝트를 아예 포기하지는 않되, 자신에게 조금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면서 자기반성, 아니, 자기 비난을 많이 했다. 개인 시간을 더 쪼개지 않는 게으른 나, 퇴근하고 소파에 늘어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보 같은 나, 아침에 더 일찍 일어나 운동하지 않는 잠만보 나. 나 자신을 힐난하자니 지적할 거리가 산더미같이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좀 억울해졌다.
‘퇴근하고도 뭔갈 더 성취해야지’, ‘생산적인 저녁을 보내야지’, 다짐하고 나니 분명 하루의 1/3을 일하는 데에 쓰고 있는 나의 성실한 삶이 얼라리? 숏폼 중독, 게으름뱅이의 전형이 된 것이다. 난 분명 하루의 삼분지 일을 일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다짐 하나도 못 지키는 스스로가 한심하다가도, 나 자신에게 채찍만 휘두르고 있는 이 상황에 화가 났다. 왜 나까지 나한테 이러고 있는 거야!
롱폼의 삶도 갓생은 아니지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고 깨달았다. 내가 나를 아껴주고, 내가 나를 위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그러지 않을 거야. 아무도 내가 그래서 뭘 하고 싶은지 진심으로 궁금하지 않을 거고,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고민하지 않을 거고, 내가 요즘 잘 지내는지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내가 나를 위해서 해야 하는 거니까.
그때 깨달았다. 내가 어느새 ‘롱폼의 삶’을 곡해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건 길게 생각하는 삶이었지, 생산적인 삶이 아니었는데!
내게 무언가 길게 생각할 거리가 필요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를 생각 의자에 앉힐 무언가. 너무 무거워 나를 마냥 착잡하게 만들면 안 되고, 그렇다고 다른 즐거움으로 해찰할 정도로 가볍기만 해도 안 됐다. 적당한 강제성과 흥미를 둘 다 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_"롱폼의 삶 도전기 1: 다짐"
‘강제성’에 매몰되어 무언갈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정작 본연의 일인 기록엔 소홀했다. 아, 난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걸까?
여전히 내 소개글엔 “안녕하세요, 일상의 생기를 포착하는 글쓴이 박주은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내 일상의 생기를 다시 불어넣을 필요가 있겠다. 오래 생각하고, 깊게 관찰하고, 다시 일상의 반짝임을 잡아채는 날카로움을 길러야지. 다시 글쓴이가 되어야겠다.
다시 돌아온 캠퍼스의 전경. 이 계절에 돌아오길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