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K-Pop의 한계 돌파 시리즈, 마지막 편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에서는 케이팝이 어떻게 국적이라는 한계를 돌파하는지 다루었다면, 이번 편에서는 세계화와 함께 드러난 케이팝의 새로운 한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빙산의 일각처럼 저평가되었던 케이팝의 인종차별과 “케이팝”의 명명 효과다.
케이팝, 인종차별 산업?
각양각색의 소비자층이 존재하는 케이팝치고는 드물게도, 거의 모든 소비자가 거세게 비판하는 지점이 있다. 한국의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다.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는 범세계적인 문제지만, 케이팝 산업의 경우 내부적으로는 한국 고유의 문화·역사적 맥락에, 외부적으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위상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점에서 특유의 다층적이고 복잡한 성격을 지닌다.
여기, 가수 ‘리사(Lisa)’가 있다.
그는 3세대 걸그룹 ‘블랙핑크’의 멤버로 데뷔했고, 5세대 아이돌이 데뷔하는 지금까지도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아이돌이다. ‘BLACKPINK in your area’를 듣고 블랙핑크라는 그룹을 연상하지 않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블랙핑크의 첫 타자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치러낸 리사는 강렬한 힙합곡
경력의 최고점을 찍고 있는 리사를 보면 한국의 대중 또한 열광하는 것이 당연하나, 다른 블랙핑크 멤버들에 비해 한국의 네티즌들이 리사를 향해 취하는 태도는 일관성 있지 않다. 그의 외양이, 성격이, 국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블랙핑크의 해외 무대 영상을 보며 리사의 국위선양을 찬양하기도 한다. 이 미묘한 이중성에는 케이팝 향유자들이 리사와 맺은 복잡미묘한 관계가 있다. 리사의 발자취, 그가 걸어온 케이팝의 역사를 살펴보자.
리사가 데뷔했던 아이돌 3세대는 외국인 멤버의 합류가 본격화되었던 시점으로, 태국인인 리사에게 그리고 다른 외국인 아이돌들에게 극심한 외국인 혐오가 쏟아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낯선 생김새를 배척하는 환경에서 외국인 멤버들은 ‘한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외국인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어가 유창해야 했고, ‘한국인 같은’ 행동이 매력 있었고, 모르는 한국어 단어를 물으면 ‘귀여움’ 받거나 모자란 취급을 받았다. 모국어에서 비롯된 억양은 종종 언어의 서투름으로 치환됐다. 누군가의 이상(Idol)이 되어야 하는 아이돌들 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내의 외국인들이 살아갔던 (혹은 여전히 마주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케이팝이 이제 막 새로운 매력과 만나던 시기는 시행착오로 가득했다.
강력한 랩과 무대 장악력, 뛰어난 춤 실력은 낯선 얼굴의 외국인이라는 특징이자 장애물을 넘어 리사를 화제의 중심으로 올려주었다. 그러나 모든 반응이 호의적이진 않았다. 태국인인 리사는 동남아시아인을 향한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맞서야 했다. 한국인들에게 태국은 소위 ‘낮은 계급’의 나라로 인식됐고, 혐오 발언은 인터넷으로 넘쳐흘렀다. 그는 한국의 대중에게 같은 계급의 사람임까지 ‘인정’을 받아야 했던 셈이다.
그러나 솔직히, 리사가 인정받을 것이 아니라 대중이 깨닫고 반성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아직도 리사와 관련된 영상을 볼 때마다 그의 인종, 국적을 언급하며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를 말하는 댓글을 발견한다. 팀 내의 유일한 외국인, 동남아계 멤버로서 그가 마주한 천장은 다양한 인종의 케이팝 향유자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그 본질이 다르지 않으며, 뿌리 깊은 혐오야말로 진정한 ‘다국적’ 케이팝을 위해 케이팝이 돌파해야 할 한계다.
험난한 3세대를 거쳐 4세대, 5세대. 여전히 그들의 서툰 한국어를 그저 귀엽게만 소비하는 팬들이 있고, 짙은 피부색과 뚜렷한 이목구비의 조합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케이팝은 조금씩 그 한계를 돌파해 가고 있다.
리사와 같은 태국 국적의 후배 아이돌인 민니(아이들)와 나띠(키스오브라이프)는 자국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태국어 가사를 추가하는 등 무대에 적극적으로 태국어를 활용하고 있다. 그들의 국적과 정체성은 매력의 한 요소가 되었고, 팬들은 태국어 무대에 환호한다. 얼마 전, JTBC에서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거나 외국계 혼혈인 패널만으로 구성된 <아는 외고>를 시작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연예인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으며, 그들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아티스트, 연예기획사의 몫이 주를 이루었던 다른 한계와는 다르게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는 향유자이자 케이팝 산업의 소비자인 대중의 역할이 크다. 내가 무의식중에 인종을 차별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간단하다. 나의 즉각적인 호오에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다. 왜 이 가수/곡/뮤직비디오가 내 마음에 드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나 또한 이런 방식으로 내 안의 혐오를 발견한 적이 있다.
명명에서 낙인으로
안타깝게도, 세계화 시대의 한계는 한국 내부에서만 노력한다고 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2024 VMA Best K-Pop 부문의 이름을 찬찬히 읽어보자. K-Pop이다. 리사라는 이름을 생각했을 때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Rockstar]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 또한 더 넓은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리사가 넘어야 할 산이자 케이팝이 마주하는 또 다른 한계라는 것이다.
스웨덴 그룹인 아바(ABBA), 콜롬비아 가수인 샤키라(Shakira) 등등, 분명 영어권 바깥의 외국인임에도 국적의 꼬리표 없이 영미권 팝에서 인정받는 가수들이 있다. 그러나 케이팝은 유난히 ‘케이’ 팝이라는 수식어를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대부분의 유명 비 영미권 가수들이 백인, 혹은 유럽계 혼혈인이라는 인종적인 면모 또한 고려해야 하지만, 유독 케이팝이 그 장르로 한정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케이팝이라는 이름에 주목해 봤다.
음악과 기획 면에서 케이팝이 가지는 특색은 분명 하나의 장르로 분류될 만하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 장르명에 ‘낙인효과’가 붙은 것 같다. 케이팝 가수들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케이팝에 있는 ‘K’라는 어두가 역으로 꼬리표가 되어 어떠한 돌파를 막고 있다는 뜻이다.
‘케이팝’의 긍정적인 명명 효과는 뚜렷하다. 한국을 선전하는 K부터 음악의 장르가 된 케이팝, 이제는 문화 스펙트럼으로서 기능하는 한계 돌파까지, 케이팝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명이 어느새 낙인이, 외부적, 내부적인 틀이 된 느낌이 든다.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케이팝 가수의 음악이라도 자연스럽게 ‘Best K-Pop’ 부문 후보에 오르거나, 새로운 형식의 음악을 시도하는 케이팝 아티스트들을 향해 ‘케이팝’이 아니라는 비판이 이는 일들에서부터 느낀 감상이다.
진정한 다국적 케이팝이란 무엇일까?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또 재생산하는 케이팝의 특성처럼, 낯선 인종과 문화를 배척 없이 흡수하는 생태계를 만들고 세계 또한 그런 케이팝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때야말로 케이팝이 진정한 ‘지구(글로벌)’를 획득하는 순간이 아닐까.
한계 없이 끝없이 뻗어나가는 문화,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케이팝이다. 앞으로도 그 명목을 이어 나갔으면 하는 마음에 몇 자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