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에서 메시지를 원한다면 차라리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서 보내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이는 당시 영화에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으려 했던 제작자들에 대한 반박이자, 영화란 명제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표현의 매체라는 그의 사조를 함축한 격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의 관객은 단순히 상영 시간 동안의 경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혹은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억을 반추하는 과정 속에서 감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된다. 같은 책이라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듯, 영화 역시 반복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낳는 매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영화 감상의 변화를 논할 때, 이러한 특성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장르 중 하나가 어린 관람객을 주요 수요층으로 둔 청소년 애니메이션이다. 청소년 애니메이션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서사와 명확한 교훈을 전달하는 장르로 인식되지만, 관람자의 성장과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층위의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가족 단위 관객을 전제로 하는 애니메이션은 교육적·교훈적 성격을 일정 부분 요구받는 동시에, 과도한 설명이나 지나치게 심도 있는 개념은 지양해야 한다는 제약 속에서 제작된다. 이와 더불어 성인 관객의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 절제된 유머와 장치 또한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청소년 애니메이션은 단순함과 복합적 해석 가능성 사이의 균형을 끊임없이 요구받는, 가장 까다로운 형태의 현대적 우화라 할 수 있다. 청소년 애니메이션의 해석과 비평에 있어 본 글이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디즈니의 〈주토피아〉 시리즈이다. 첫 번째 작품이 개봉한 이후 9년 만인 2025년에 공개된 〈주토피아 2〉를 포함하여, 본고는 시리즈 전체를 재감상하며 형성된 새로운 시선을 바탕으로 영화 속 영화의 미장센, 나레티브 그리고 정치적 알레고리를 중심으로 비평을 시도하고자 한다.
어떤 시리즈물이 되었든, 최초 시즌의 아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흥행작은 거의 없고, 〈주토피아〉 시리즈 역시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으나, 후속작이 보이는 나레티브의 탄탄함과 설득력이 보다 확장되어 정교해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도시의 재해석 : 동물들의 유토피아의 서사와 미장센을 중심으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주토피아라는 도시 자체에서 드러나는 미장센이다. ‘주토피아(Zootopia)’는 Zoo와 Utopia의 합성어로, 작품 내내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열려 있는 이상적인 도시라는 점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다룬 대부분의 예술적 매체가 그러하듯, 완벽하게 이상적인 사회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명제에 가깝다. 이러한 인식 아래, 두 편의 영화는 공통적으로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는 서사 구조를 따르며, 유토피아가 내포한 모순과 그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리즈의 첫 작품이 도시의 전경과 구조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도입부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표리부동한 사회 구조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반전을 주요 플롯으로 삼는 1편은, 주토피아를 구성하는 다양한 구역을 대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도시의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기후벽으로 명확히 구분된 각 구역은 색채와 건축 양식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이는 곧 삶의 질과 계층 구조의 격차를 암시한다. 예컨대 실종된 수달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진입하게 되는 열대우림 지구는 어둡고 눅눅한 색조, 무질서하게 배치된 건물 디자인을 통해 빈민가 혹은 판자촌을 연상시키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이는 부유층 거주지로 설정된 툰드라 지역의 정돈된 건축 구조와 파랑·하양 계열의 차가운 색채가 만들어내는 안정적이고 청결한 이미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공간적 대비는 주디가 처음 주토피아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하이앵글로 제시되는 도시 전경을 통해 한눈에 각인되며, 이후 전개될 서사의 상징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다만 1편에서 강조하는 것은 화해와 이해의 서사이기 때문에, 이러한 다름을 모두 포용함에 중점을 맞춘다는 것에 한계점이 있으며,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관점 역시 본고에서 추후에 언급할 예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토피아 2〉가 도시를 활용하는 방식은 전작에 비해 확연히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갈등의 발원지는 주토피아를 구획하는 ‘기후벽’이다. 기후벽은 서로 다른 종의 동물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설계된 장치이자, 동시에 도시 내부의 계급화와 분리를 고착화하는 구조물로 기능한다. 특히 이 장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기원’이 본격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누가 주토피아를 설계했는지, 어떤 기준으로 시민을 선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종들이 배제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새로운 캐릭터들을 통해 겹겹이 제시되며 서사를 확장해 나간다. 영화는 배제된 존재를 파충류, 그중에서도 ‘뱀’이라는 상징적 종으로 설정하는 한편, 설계 단계에서 이미 기울어진 권력 구조에 편입되고자 하는 스라소니 포버트를 반동 인물로 배치함으로써, 도시의 역사 자체가 어떻게 왜곡되고 재서술되는지를 드러낸다. 이처럼 음모론적 서사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주토피아 2〉는 도시의 비밀을 다양한 시각적 미장센으로 구체화한다. 일례로 닉과 주디가 포버트를 체포하기 위해 맞닥뜨리는 미로는, 겉보기에는 질서정연해 보이는 주토피아가 실은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설계된 공간임을 상징한다. 이때 미로를 해독하기보다 포크레인을 이용해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주인공들의 행동은, 기존 질서 안에서 해답을 찾기보다 구조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태도로 읽힌다. 또한 파충류들이 은신한 습지 지대에서의 추격전은 중앙 권력이 접근하기 어려운 주변부 공간으로 설정되며, 도시가 외면해 온 영역이 결국 더 큰 혼란과 갈등을 낳는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이처럼 〈주토피아 2〉는 1편에서 비교적 단면적으로 제시되었던 화해와 합일의 서사를 넘어, 갈등이 발생하게 된 근원적 원인을 도시의 설계와 역사 속에서 탐구한다는 점에서 비평적 의의를 지닌다. 이는 차이를 포용하자는 선언에 머물렀던 전작의 한계를 보완하며, 주토피아라는 공간을 보다 적극적인 평등의 장으로 확장한다.
정치적 올바름 : 주요인물의 캐릭터성과 반동인물의 입체성을 중심으로
〈주토피아〉의 주된 서사를 이끄는 인물은 토끼 ‘주디’와 여우 ‘닉’으로, 이들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따라간다. 사회적 편견 속에서도 경찰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주디와, 비주류에 속한 조력자 닉이 만나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구조는 굉장히 평범한 클리셰이다. 그러나 작품이 흥미로운 지점은 협력 관계가 단순한 연대에 머무르지 않고, 인물 간의 균열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균열은 실종된 포유류 사건을 해결한 이후 진행되는 기자회견 장면에서 본격적으로 표면화된다. 주디는 실종자들이 모두 포식자였으며, 집단적인 광기를 보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당 사건이 종의 특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발언한다. 순간 영화는 주디를 무의식적으로 편견을 재생산하는 가해자의 위치로 이동시킨다. 이에 닉은 어린 시절 포식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던 자신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자신 역시 언제든 ‘위험한 존재’로 규정될 수 있음을 냉소적으로 지적한다. 영화의 큰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당 지점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지속하던 영화가 역차별에 대한 나레티브를 끌고 오는 부분이다. 주토피아 세계관에서 닉은 포식자의 층위에서 완벽한 주류가 아니지만, 피식자의 시선에는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애매한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그의 감정이 설득력 있다는 의견이 있지만, 초식동물이 받을 생존적 위협과 육식동물의 감정적 트라우마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는 비판이 역시 이루어졌다. 이후 두 인물의 화해는 주디의 일방적인 사과를 통해 이루어지며, 닉은 이를 ‘감정적인’ 토끼라고 되받아치며 주토피아가 본질적으로 다루고 있는 편견과 차별에 대한 특성을 강조하는 아이러니함을 보인다. 이러한 묘사는 어릴 적 주디를 공격했던 여우와의 갈등을 그저 치기 어린 실수일 뿐이니 이해해달라는 흐지부지한 사과의 말과 다를 바 없어보이는 형태이다.
‘역차별’에 대한 나레티브는 영화의 반전에서 강조된다. 시장의 비서 벨웨더가 최종적인 악역으로 등장하는 대목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벨웨더는 주토피아가 약자에게 가하는 구조적인 차별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캐릭터이다. 벨웨더는 라이언하트 시장이 초식동물의 표심을 잡기 위한 보여주기식 인사라는 명확한 언급이 있을 뿐더러, 과도한 업무 아래 비서임에도 열악한 근무환경에 시달리기도 한다. 소형동물 최초로 경찰이 된 주디를 표창하며 자랑스러워하던 그녀를 밀어내고 사진을 찍으려하는 시장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멸시가 은연중에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비판점은 그녀를 절대악으로 만들어내면서 시작된다. 벨웨더가 거쳐온 서사와 그녀의 분노를 묵과하고 약자를 체포한 또다른 약자가 특별한 영웅이 되는 결말은 한쪽으로 치우친 결말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더하여, 주디와 닉처럼 명백히 차별받는 동물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내놓은 행적적 해결책은 개인적 인식 개선이라는 탁상공론에 그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가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방식에 오독의 여지가 다분하며, 정작 시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에서 그 결과가 매끄럽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주토피아 2〉는 해당 문제에 대한 적절한 보완점을 찾은 작품이다. 차별을 단순한 오해 및 갈등으로 치부하지 않고, 차별이 생겨난 구조와 역사로 시선을 돌린다는 점에서, 전작에서 한 단계 진전한 사고를 보여준다. 다양성과 공존이라는 주토피아의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며 젠트리피케이션과 제노포비아 개념을 들여와 다소 모호했던 전작의 메타포를 선명하게 전환했다. 철저하게 기득권 층의 선민의식과 약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주제를 명확화하는데, 일례로 쫓겨난 뱀인 게리의 성우를 중국계 베트남인 키호이콴으로 발탁한 것은 미국의 차이나타운 젠트리피케이션 메타포를 떠먹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선택임을 쉽게 알수 있을것이다.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이 인상적인데, 전작에서 메세지가 역전되었던 악역 벨웨더와는 달리, 후속작에서는 여지를 배제하면서도 동정을 줄 여지가 있는 악과 완연한 악을 구분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주축이 되었던 닉과 주디의 서사를 이해와 사랑에 대한 개인적 측면으로 좁혀 평면적인 평등에 대한 주제로 읽히는 것을 방지하면서도, 조연 및 반동 인물의 서사를 추가하며 전체적인 사회 비판 역시 놓치지 않은 셈이다.

이 과정에서 포버트 링슬리는 〈주토피아 2〉에서 가장 입체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반동 인물로 기능한다. 그는 링슬리 가문의 일원으로 완전히 인정받지 못한 채 성장한 존재로, 강한 인정 욕구를 내면에 품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결핍이 그를 배신의 선택으로 이끈 핵심 동기임을 분명히 제시한다. 링슬리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에게 진정한 온기와 연대를 제공한 이들을 배반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가장 갈망하던 ‘소속’을 스스로 파괴한다. 그는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안정과 애정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속한 가문의 우월주의적 가치관을 끝내 내려놓지 못한다. 범죄를 저지른 이후 드러나는 그의 반성과 동요는 링슬리를 단순한 악인이라기보다 주체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인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요에도 불구하고, 그의 악행은 즉흥적이거나 공허한 것이 아니라 가문의 기준과 논리에 의해 일관되게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불편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그의 첫 파트너가 되어준 뱀 게리와는 확연히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링슬리는 배제된 존재로서의 연대보다 배제하는 구조의 일부가 되기를 선택한 인물로 남는다. 이 선택은 그를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차별의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을 왜곡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를 완성하기에 높은 서사적 완성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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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에서도 언급했듯 〈주토피아 2〉 자체의 스토리와 재미는 전작을 압도하기에는 부족하다. 여러 주조연급 인물이 등장하면서도 닉과 주디의 서사를 살려야하는 다층적인 과제를 안았다는 특성 때문에 플롯의 연결점이 끊어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들, 다시 말해 스스로의 역사적 부정의를 인식하고 바로잡는 방식과, 배제되고 낙인찍힌 존재들의 공동체 재편입 방식의 문제는 몇 가지 서사적 장치로 정리될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후반부에 제시하는 해법은 이러한 질문의 무게에 비해 다소 낙관적이며, 전연령 애니메이션의 구조적 제약 때문인지 익숙하게 반복된 공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전편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다시 호출하면서도 그 해결 과정은 오히려 단순화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다양한 비평이 존재하나, 〈주토피아 2〉는 최근 속편 제작에 고배를 마시던 디즈니의 성공작임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주토피아〉 시리즈는 유토피아를 완성된 이상향으로 제시하기보다, 그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과정에 더 가까운 작품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결국 주토피아는 결국 도달해야 할 유토피아라기보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상상하고 선택할 것인지 되묻는 공간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주제 의식의 연결성과 그 전달 방식은 거대한 의의를 가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