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수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소설 전문 낭독자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조선 후기 소설 향유층이 늘어나면서, 세책방에서 책을 빌려 읽을 수 없는 가난한 문맹자들을 위하여 전기수가 나타났다. 그들은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 등으로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달하여 사람들이 잔뜩 몰입하게 했다. 사람들이 가장 깊이 빠져든 때에 입을 꾹- 다물어 다음에 이어질 말을 조르게 하는 둥, 밀당으로 관중을 들었다가 놨다 마구 뒤흔들어놓던 저잣거리의 도파민 공급자! 저잣거리가 무어냐, 이제는 나라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한 명의 뉴페이스 이야기꾼이 탄생을 앞두고 있다.
19세기 조선, 희대의 전기수 호태에게 양반가 자제 달수가 찾아 오면서 '판'은 열린다.
촘촘하게 엮어 만든 액자식 구성
뮤지컬 <판>은 하나의 서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메인이 되는 다른 뮤지컬과는 달리 여러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펼쳐지는 액자식 구성을 보인다. 현실과 액자,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의 또 다른 액자 속 이야기가 반복되는 구조이다. 비유하자면 마트료시카 같은 액자 속의 액자 구성이라기보다는 타일처럼 액자가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달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억 구슬처럼, 쭉 펼쳐지는 여러 이야기 가운데 슬픔, 기쁨, 분노 등이 서로를 받쳐주며 탄탄하게 짜여있다. 각 이야기 하나하나가 빠질 수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극의 주요 서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애정 서사와 현실 비판 서사이다. 자유연애를 꿈꾸며 금지된 사랑을 이루려 애쓰는 달수와 덕의 이야기, 그리고 갑갑한 유교적 질서와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 및 저항하고자 하는 모든 캐릭터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섞이며 입체성을 견고히 한다. 조선시대가 배경이라지만 현대 우리나라 정치사를 꿰뚫는 재치 있는 풍자로 웃음을 유발한다. 함께 웃는 이들과의 소속감과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따뜻함을 마음으로 직접 느끼도록 한다.
폭력적인 현실에 직접 맞서는 것은 어렵다. 억압이 가득하던 신분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서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깨어 있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매설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을 하고자 한다. 서로 의지하며 이겨내려는 자세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정의와 신념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연출과 소품 활용의 극치를 보여주다
이 극의 묘미는 이러한 서사를 말로만 설명하지 않고 인형극, 가면극, 꼭두각시놀음을 더하여 눈과 귀에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에 있다. 달수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판을 벌이는 장면에서 인형으로 생생한 연기를 보여준다. 달수와 덕이 애정을 쌓아 올리면서 덕의 소설을 선보이는 장면에서도 인형을 활용한 외줄타기 공연을 선보인다. 실제 외줄타기를 보여줄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한 것을 넘어, 인형극만이 가능한 연출을 보여줌으로써 만족스러운 환상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자유를 향한 열망과 군중의 움직임을 상징하는 새 떼와 클라이스에서 흩뿌려지는 꽃잎으로 해방감을 선사한다. 또한 카혼을 활용한 폭발적인 난타 공연도 이 순간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한다. 극 중 조명과 라이브 세션의 절묘한 활용과 무대 양옆에서 함께 극을 완성해 가는 산받이와 음악 감독님의 호흡도 일품이었다.
이 극의 흥겨운 분위기를 이끄는 주역으로는 제4의 벽을 넘나들며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 산받이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면서도 여러 캐릭터의 역할을 돌아가면서 맡음에도 성별과 연령대를 초월한 진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얼쑤! 씨구야! 좋다! 잘한다! 극 중 내내 심심할 틈 없이 장단과 가락을 이끄는 산받이가 이 극의 톡톡 튀는 감초이자 고명이었다.
무대가 관객석으로, 관객석이 무대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관객 참여형 공연 중에서도 난도가 높은 호태의 즉흥 이야기! 현장 관객에게 제시어를 받아 이야기를 지어내는 시간이었는데, 실패할 위험이 있음에도 과감하게 시도하는 자세 역시 돋보였다. 내가 배우가 된 듯 긴장하며 즉흥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니 내가 더 뿌듯한 그 마음을! 배우가 된다는 게 이런 걸까 생각해 보았다.
입장 시 나눠주는 뻐꾸기 불로 무대 위 캐릭터, 어쩌면 배우들을 응원하며 무대와 관객석이 이어져있다는 감각을 공연 내내 유지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공연의 명맥도 관객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우리 관객을 공연의 일부로 끌어올리는 연출이 <판>의 서사 및 소재적 특성을 내밀하게 이해하고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뮤지컬이라는 틀에서 판소리, 전통극 등 우리 문화를 자유롭고 과감하게 보여주는 뮤지컬 <판>, 즐겁게 관람하고 기분 좋게 나왔다. 올해 첫 관극으로 손색없는 시원한 이야기, 여러분도 느껴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