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이오진 연출의 신작 연극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가 11월 26을 시작으로, 12월 14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펼쳐진다.
처음 이 연극에 눈길이 갔던 이유는 작곡의 '단편선'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제22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과 ‘최우수 모던록 음반’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던 '단편선 순간들'의 <음악만세> 앨범을 인상 깊게 들었던 바, 뮤지션 단편선과 극작가 이오진의 협업으로 완성된 음악극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놓칠 수 없었던 극이다.
"어떤 여자들은 노벨상을 탄다"로 시작하는 메인 테마곡 역시 단편선 특유의 색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단편선 순간들의 싱글 "독립"에서 노동운동가 김진숙의 연설을 직접 삽입했던 것이 자연히 연상되며 이번 작품에서도 "울면서도 춤추게 만드는" 단편선의 감성이 극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고 느꼈다.
나는 작품을 볼 때 사전 정보 없이 가능한 한 '날것'의 상태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 예측 없이 막이 올랐고 '히스테리'의 어원에 대해 읊는 대사를 듣는 순간, 이 극이 종래 선명한 메시지로 수렴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긴장이 감돌았다.
'히스테리'는 고대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즉 자궁—에서 유래한 말로, 여성의 신체를 원인으로 감정을 병리화했던 오래된 의학적 편견의 산물이다. 자궁이 몸속을 떠돌며 병을 일으킨다는 가설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폐기된 미신이지만, 그 용어에 남아 있는 젠더적 잔향은 분명히 인지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오랫동안 여성의 감정을 '비이성적', '과잉', '불안정'으로 규정하며 일축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이제는 남녀 불문하고 이 표현을 갖다 붙이면서도 '노처녀의 히스테리'라는 표현이 유독 한 세트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대 그리스로 돌아와서, 히스테리의 해결책은 결혼이었다. 그리고 무대 위 할머니들은 바로 그 결혼을 하지 않은 이들이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히스테리라는 개념이 품은 비틀어진 젠더의식을 첫 장면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작품은 이를 대립의 구도로 밀고 가지 않는다고 느꼈다. 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이 겪는 감정의 불안, 동요, 흔들림의 본질 정도이지 '히스테리'를 특정 젠더의 속성으로 환원시킨 어떤 사회적 기조에 대해 냉랭히 절연을 선언한다고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작품은 히스테리를 앵자이어티와 동일선상에 두며, 그 개념을 젠더적 병명에서 인간의 불안이라는 보편적 정동으로 확장한다.
〈히스테리 앵자이어티〉는 두 개의 시점으로 갈라지는 구조를 취한다. 1막 ‘2025년의 여자들’은 현재를 살아내는 여성들의 작은 기술, 일상의 버티는 방식을 차곡차곡 담아내고, 2막 ‘2058년의 여자들’은 생활동반자법·사회적 가족법이 자리 잡은 근미래를 상상하며, 여성들의 불안이 제도와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탐색한다.
사후 알게 된 사실로, 여섯 명의 여성 배우—김유림, 김은희, 이화정, 정대진, 황미영, 황순미—는 석 달 동안 각자가 지닌 불안, 분노, 가난의 내력을 글로 풀어냈고, 그 경험이 1막을 떠받치는 핵심 골격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나는 어떤 노인이 될 것인가”라는 담론으로까지 나아갔다고 하니, 1막의 서사가 유난히 살아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어디까지가 배우의 실제 경험인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모호함이 자꾸 1막의 내용을 되새김질 하게 한다.
2막은 이오진 연출이 구축한 허구적 미래를 무대로 삼는다. 사회적 제도와 함께 살고 있는 환경이 '연대'를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주식으로 벌어들인 돈을 남기고 유림이 교통사고로 죽자, 할머니들은 상속 지분을 두고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생활동반자법·사회적 가족법에 따라 법적 우선순위를 따지거나, 돌연 생전 유림과 연인이었음을 밝히고, 몸이 안 좋으니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몫을 더 달라는 등 각자의 이해관계를 피력한다. 심지어 각자의 꿈에 나타난 유림을 두고 이것이 '계시'라며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는 식으로 물질이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하나를 갖고 둘을 갖지 못하는 걸 남 탓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다 함께 살 수 있다.”며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일침을 놓은 뒤, 결국 자기 딸에게도 조금 달라고 말하는 순간 이 양상이 최절정에서 폭발한다. 이 순간 관객들은 폭소하면서도 여성의 연대만이 이 극의 쟁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이 갈등이 지나치게 극화되지 않고 거의 생활의 단면처럼 제시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우리 모두에게 있을 법한 모순을 해학적으로 비춰준다. 이러한 균열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결국 소송이나 파국이 아닌 '다시 커피를 마시는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관계란 그렇게 느슨함을 생명으로 간신히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음악극이라는 점 역시 중요하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 아마 불안이라는 것의 비가시성을 음악과 몸짓이 더 깊게 파고든다.
다만 나는 이 극 속 세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지는 못했다. 무대 위 할머니들의 삶을 내 것처럼 느끼기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관찰하는 듯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이 작품 속 할머니들과 나는 성별은 공유하지만 나이대를 공유하지 않는다. 히스테리와 앵자이어티라는 감정 자체는 때때로 공유하지만, 그 감정이 향하는 방향이 다르다. 나는 '노년의 공포'보다는 '자립 가능한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시기에 있다. 사실 이는 두려움이면서 동시에 묘한 설렘이기도 하다. 본질은 같지만 작품 속 할머니들의 불안이 이미 많은 것을 거쳐온 이들이 남은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면, 내 불안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공간 앞에서 느끼는 막연함이다.
그럼에도 공감과 이해 사이 어딘가에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생각해본 적 없는 삶의 양식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아직 경험하지 않은 삶의 국면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연극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끝으로 주목할 점은 음악의 분위기를 세밀히 묘사해주는 자막과 스크린에 띄워진 자막 그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대사를 뱉어내는 배우들의 호흡, 이것들을 포함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들이다.
공연 기본 안내와 소통을 문자로 지원하고, 지하철역에서 공연장까지 이동을 돕는 안내보행을 제공하며, 극장 내 휠체어 입장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전 회차 관람 전 극장 로비에서 접근성 매니저가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의 무대 모형, 의상 모형 등을 만지며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감각 경험을 진행한다. 공연 예술의 경험 자체를 누구에게나 열어두려는 태도가 기획 전반에 녹아 있었는데 작품에서 회자된 메시지—연대란 무엇인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와 무대 밖에서의 실천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지점이어서 좋았다.
〈히스테리 앵자이어티〉는 여성 서사를 다루되 정체성에 마냥 갇히지 않고, 관계의 본질과 인간의 모순을 들여다본 작품이었다. 또 그 질문을 무대 안팎에서 일관되게 실천하며, 극의 역할을 아주 충실히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