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나마 글과 가까운 삶을 사는 건 팔할이 엄마가 매일 밤 읽어주던 동화책 덕분일 거다.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고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만의 이야기를 조잘댔던듯도 하다. 기억을 믿기도 오래전 일이지만, 그래도 책장에 아직 처분되지 않은 빛 바랜 세계 동화전집이 빼곡한걸 보면 있었던 일은 맞다.
그리고 한참은 활자가 지배적인 책들을 봐오다가 아트인사이트 전시 <틔움>을 보러 갔을 때 오랜만에 그림책을 마주했다. 어른을 위한 그림책을 재인식하게된 계기였다.
나는 근래에도 사유와 영감의 전파를 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처음엔 예술 전시로, 벽을 더 허물 수 있을거란 기대 아래 웹 서비스로, 아니면 지금처럼 글로 누군가가 전에 없던 생각을 돌아보기를 바랐다. 혹시나 이런 과정에서 글 없는 그림이 너무 어렵고 그림 없는 글에 건조함을 느낀 사람이 있다면 그림책이라는 옵션이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혀가 길어지고 중언부언하며 진심을 포장할 수 없도록 하는 간결함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이러한 연유로 미안 작가님과 함께하는 그림책 입문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었다. 스토리 기획부터 시각적 내러티브의 구성, 더미 북 제작에 이르기까지 그림책 창작의 전 과정을 하나씩 따라가며, 앞으로 두달간 한 권의 그림책을 완성해 실물 양장본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할 예정이다. 내 형편없는 그림 실력을 간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의미있는 과정이기 바란다.
금요일 저녁, 마곡역 인근 ABOU Studio를 찾았다. 첫 시간에 대한 소회를 먼저 공개하자면, ‘그림책은 단순히 글과 그림이 함께 있는 책이 아니라, 그 구조 자체가 이야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림책들을 펼쳐 보면서 의도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으니 장면의 펼침 방식, 종이의 질감, 여백의 사용, 물리적 형식 전반이 서사의 일부라는 게 확 와닿았다.
왜 그런 소회가 들었는지, 작가님이 소개해주신 다양한 레퍼런스를 나눠보고자 한다.
그림책 레퍼런스
〈파도는 나에게〉 하수정 - 드넓은 바다와 부서지는 파도를 중심으로 하루의 감정이 은유 된다. 반복되는 파도의 결, 투명한 수채 톤, 여백 가득한 장면은 읽는 이에게 쉼을 건넨다. 시간의 정지와 감정의 겹이 함께 호흡하는 작품이다. 책장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면서 파도 치는게 인상적이었다. 뭇 사람들은 힘들 때 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곤 하는데 이 책을 보며 그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관계의 조각들〉 마리옹 파욜 - 텍스트 없이 그림만으로 인간관계의 단면들을 엮는다. 한 컷 한 컷 조각처럼 구성된 장면들 속에서 독자는 저마다 다른 해석을 만든다. 말보다 강한 장면들로 관계의 ‘사이’를 느끼게 한다. 석공, 여행하는 여인, 불을 당기는 여자 와 같은 목차가 있는데 한 장에 빼곡히 이 대상들이 들어 차 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우리는〉 요하나 숨은 볼래 - 페이지 크기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한다. 수억 년 전의 과거에서 시작하는 첫 장 부터 현재를 담은 책의 중간 지점까지 페이지 크기가 점점 줄어들다가 현재를 기점으로 이야기가 미래로 향하며 다시 커진다. 공간으로 시간을 설명한다는 말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 친구 어디 있어요?〉 베르나르두 카르발류 - 양방향 읽기가 가능한 그림책. 한쪽으로 읽으면 반딧불이의 여정, 반대쪽으로는 토끼와 사냥개의 탈출. 물리적 구조로 두 개의 서사를 동시에 품은 이 책은 텍스트 없이도 완결된 세계를 전달한다.
《나씨의 아침 식사》 제작기
총 8주라는 시간은 그림책 한 권을 온전히 구성하기엔 촉박한 편이라, 미안 작가님의 첫 작품이자 비교적 단순한 서사를 지닌 〈나씨의 아침 식사〉를 중심으로 스토리보드 설계 방식을 들여다 보았다. 이야기의 골자는 식탁 위 만두 네 알을 먹기 위해 나무늘보가 하루를 꼬박 이동하는 여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단조로운 플롯이 ‘지루함’이 아니라 ‘의도된 정적’으로 읽히는 데에서, 이야기 구성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보통의 스토리보드 작업이 시간의 흐름이나 감정의 변화, 사건의 전개를 따라 컷을 나누고 장면을 전환시키는 식으로 구성된다면, 〈나씨의 아침 식사〉는 시간은 무심히 흐르되 인물의 감정은 정지한 채 지속된다. 개미가 만두를 갉고, 파리가 엉겨붙는 장면에서도 ‘불쾌함’, ‘분노’, ‘좌절’ 같은 리액션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감정 표현을 제거함으로써 독자가 답답함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이런 의도성이 스토리보드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고집할지를 결정하는데 주춧돌이 된다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연히 작품의 중심은 변화가 아니라 ‘고집스러운 일관성’이다. 하루 종일 만두를 향해 기어가는 나무늘보의 모습은 장면마다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지만, 팔을 조금 더 뻗는 각도, 입술이 아주 살짝 벌어지는 타이밍 등 극도로 미세한 차이가 설계되어 있다. 이 작품을 예시로 스토리보드를 꼭 극적인 사건 전개 중심으로 짜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이미지 한 장면이 품을 수 있는 움직임의 여백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실습] 아이디어 발견하기, 이야기 쉽게 쓰기
![[회전][포맷변환]KakaoTalk_20250714_181854230_0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16112009_qbtbxhhz.jpg)
수업 말미에는 마인드맵을 통해 나의 이야기 실마리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첫 수업 전부터 ‘지금의 내 감정을 다뤄보자’는 막연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는데, 함께 본 레퍼런스들과 다른 수강생분들의 작업 방향을 들으며 보다 구체적인 윤곽이 잡혀갔다.
나는 '감정의 소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마인드맵을 확장해 나갔다. 감정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그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마인드맵을 그릴 때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그물을 펼칠 수 있었지만 이걸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현할 것인지, 구체적인 작화 방식에 대해서는 차차 그물을 좁혀나갈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