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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나의 모험에 대하여 [도서/문학]

괜히 사람이 된 것 같다

by 정현승 에디터
2026.02.11 20:04

 

 

시인의 말


쥐의 낙서가 적힌 수첩을 발견했다


안녕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모두 내가 쓴 거야 

발톱을 괜히 먹은 것 같아


이럴 줄 몰랐어


2025년 4월

김보나

 

     

지금부터 ‘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독자가 이 시집의 맨 처음 장을 펼쳤을 때의 일이다. 시인의 말ㅡ쥐의 말ㅡ그리고 시인의 이름 세 글자. 슬쩍 그것을 가리고 다른 이름을 넣어본다. ‘쥐’가 누구의 입을 빌렸는지, 누가 ‘쥐’의 입을 빌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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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614번으로 출간된 시인 김보나의 첫 시집 『나의 모험 만화』에는 각자의 모험을 써 내려가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화자는 고등학생이 되었다가, 꽉 찬 지하철 속 어른이 되었다가 호주의 딸기 농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화자와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이름이 있다.


“무서움 많은 사람에게 검은 숲이/천천히 걸어온다”는 “소문”이 생각났을 때, 「요재지이(聊齋志異)」 속 화자는 “교실에 들어온 쥐”와 마주친다. 그리곤 그는 삶의 중요한 순간이 여러 번 교차하는 교실 속에서, “칠판에 영문 모를 낙서”를 “쥐의 글씨”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그때부터, 화자와 우리는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줄 ‘쥐’가 되었을지 모른다.


시인의 말에서 쥐가 “발톱을 괜히 먹은 것 같”다고, “이럴 줄 몰랐”다고 털어놓은 것처럼, 우리의 삶은 영웅담이나 위인전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나의 모험 만화』 속 ‘만화’는 그런 ‘쥐’의 삶에 주목한다. 시집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시 「나의 모험 만화」에서 “명대사를 터뜨릴 시간”에 “주인공은 그저 웃는”다고 서술된다. 눈부시게 성장하거나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이 모험의 끝은 친구를 만드는 일”이라는 듯이 “그저 웃는” 것이다.


시집의 제목에 ‘모험’이 들어가서일까. 혹은 이 『나의 모험 만화』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다중적이고 다채로운 목소리로 발화되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일까. 시집 속 화자와 그의 친구들은 내부인이 되었다가 외부인이 되고, 다시 내부인이 되기를 반복한다.


“워킹홀리데이 회화반에서” 만난 “딸기의 고장에서 태어난 사람”을 “나”는 “호주 브리즈번의 한 농장”에서 떠올린다(「딸기의 고장에서 태어난 사람」). “지하철 옆자리”에서 만난 “옆자리 여자”는 “바티칸에서 온 진짜배기”라고 주장하는 성수를 들이민다(「바티칸에서 온 사람」). “결혼이주여성지원센터”에서 만난 남자는 “만년설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을 갖고 8.1도의 강진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지도 모른다(「눈송이를 위한 자장가」).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내부의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경험하며 보여주고 있다. “젖 먹던 힘이 필요하단 뜻이군요, 손님.(「백봉령 버터 박물관」)”하고 발화 밖의 화자와 시 밖의 독자에게 말을 걸 수 있었던 건, 시인이 삶 속에서 치열하고 구차하게 살아가는 장면들을 포착하였고 경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모국어를 가진 이들이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 땅의 존재를 『나의 모험 만화』가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흔히들 ‘개미’나 ‘소’로 비유되는 우리, 그러니까 ‘사람’이 ‘쥐’가 된 이유가 아닐까. 이렇게 구멍 난 삶은 누군가가 억지로 바꾸어버린 운명같이 느껴진다. 발딛고 선 이곳이 현실일 텐데, 마치 돌아갈 곳이 있는 것 같다. 원래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잘못된 선택을 해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 나는 몰라요. 내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모르지 않아요. 당신이 내게 준 것과 주지 않은 것을. 그저 당신은 날 시험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대로 당신에게서 뒤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잘못이라고 사람들이 말해요.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 같지?” 나는 어느새 튀르키예어로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요. 내가 미처 고백하지 못한 응어리까지 당신이 훤히 읽잖아요. 보세요, 나의 분홍, 연두, 차가운 희망. 그것은 서서히 반짝이며 다가와요. 나는 믿어요. 조롱당하면 맛있어지는 것도 세상엔 있으니까요.

 

—김보나, 「다 뜻이 있겠지」 부분

  

 

“다 뜻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도 쥐, 아니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자 감정일 테다. “조롱당하면 맛있어지는 것도 세상엔 있”다고 “나는 믿”는다고 말하는 화자는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다 뜻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체념한 태도임과 동시에 적응한 태도일 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 뜻이 있겠지”라고 말하는 화자도, 각자의 ‘모험’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얼굴들도 함부로 불쌍하다거나 안타깝다고 여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시집은 고통과 피곤함이 어중간하게 교차하는 현실 위에서 발을 딛고 있는 이들을 무턱대고 위로하고자 만든 게 아니다.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진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거 착각이야 


누군가 눈 뜨기 전에 세계는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중략)


그래도 돼

뮬런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넝쿨을 안겨주며 친구는 말했지 


—김보나, 「상자 놀이」 부분

 

 

김보나가 말하는 “세계”는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자 놀이”하듯 미뤄둔 택배를 이제서야 까보는 우리-그만큼 하찮은 우리-일지라도, 잔인하고 치열한 세계의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라도 된다고, 화자는 “친구”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러니 수십 년이 흘러 ‘쥐’의 낙서 옆에 또 다른 낙서를 어떻게 남겨줄 수 있을까. “눈꺼풀을 틀어막는 빛”일지라도, 치열하고 처절한 삶의 자국을 따라 걷는 현대인일지라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이 글에 인용되어 괄호 처리가 된 모든 시는 『나의 모험 만화』에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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