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악마는 어디에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도서/문학]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네가 돌멩이를 내밀며 이걸 삼켜, 그러면 삼킬 생각이었어.
글 입력 2022.05.1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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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너무 사랑해서

네가 돌멩이를 내밀며

이걸 삼켜, 그러면

삼킬 생각이었어.

그러나 이젠 충분히 울었어.

골목을 빠져나가는 고양이의 야옹 소리 들리고

나는 리셋 될 거야.


- 시인의 말

 

 

 

내가 울면 별들이 아름다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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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는 사람의 눈을 본 적 있는가. 난 본 적 없는 것 같다. 감정의 동화가 빠른 편이기에 상대가 울면 나 역시 울었다. 상대의 눈과 얼굴을 들여다보기보단, 함께 일렁이는 시간을 보냈단 의미다. 그렇기에 우는 사람의 눈에 오롯이 집중한 적은 없었다.

 

내가 우는 사람의 눈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김개미 시인의 <악마는 어디에서 게으름을 피우는가>에 수록된 <내가 울면 별들이 아름다워져>를 읽고 나서다.


 

(중략)

가끔 아빠가 죽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상철이 아저씨한테 맞아 죽는 건 싫어

할아버지, 

오늘 난 여기서 잘 거야

굴뚝은 부뚜막처럼 따뜻하잖아

자다가 눈을 뜨면 별들이 보여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나를 지켜줘

얼어 죽지 않게 해주고

내 꿈에 나타나 줘

슬픈 건 무서운 것보다 나아

내가 울면 별들이 아름다워져

 

<내가 울면 별들이 아름다워져>

 

  

화자는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 변해버린 아버지에게 의아함을 느낀다. 아버지는 사채업자로 추측되는 상철이 아저씨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데, 꼼짝도 못 하는 아버지를 끝까지 차는 상철은 화자에게 두려운 존재다. 매일 엄마를 ‘던지는’ 아버지를 혐오해 가끔 그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상철이 아저씨에게 맞아 죽는 건 싫다는 아이는 두려운 공간, 집에서 벗어나 굴뚝에 자리를 잡는다. 하늘을 이불 삼아 누운 아이는 ‘자다가 눈을 뜨면 별들이 보인다’고 한다. 하늘엔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있다. 부뚜막처럼 따뜻한 굴뚝에 누운 아이는 눈을 감았다 뜨면 쏟아지는 별을 목격했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흐르듯 읽게 되는 문장이나, 시의 마지막 문장은 ‘별’의 의미를 재해석하도록 두었다.


‘내가 울면 별들이 아름다워져’


시인은 우는 아이의 눈물과 그 속에 일렁이는 눈동자에 비친 빛을 ‘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화자는 슬픈 건 무서운 것보다 낫다며, 내가 울면 별들이 아름다워진다고 말한다. 결국 별이 아름다워질 때는 곧 아이가 운다는 것이기에, 통상 ‘아름답다’가 주는 단어의 긍정적인 어감은 사라지고 씁쓸함이 자리 잡는다.

 

한 편으론 아이가 굴뚝으로 도망쳐 나오는 상황을 합리화 하는 것도 같았다. 슬픔과 무서움. 어느 한쪽의 감정을 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슬픈 게 낫고, 제 눈물은 별들이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기에 괜찮다는, 스스로를 향한 다독임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악마는 어디에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중략)

얼마나 더 살아야 할까

얼마나 더 배를 부풀리며 심호흡을 해야

쉬지 않고 먹이를 갈구하는 욕망의 그림자가

나를 포기할까

얼마나 더 걷고 뛰고 기도해야

두통 없는 밤이 찾아올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네가 빛을 끄고 내 뇌리에서 사라질까

악마는 어디에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왜 나를 보지 못하는가, 어서 와서

아직 남은 내 젊을 가져가지 않고

늙고 싶다 빨리 늙고 싶다

극도로 무력해지고 싶다

아, 네가 죽었으면!


<극심한 오늘>

 

 

이 책의 제목이자, 시인이 겪은 절절한 사랑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한 인터뷰에서 김개미 시인은 오랫동안 악마에 대해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악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있는데, 평소에는 죽어있다가 불안하거나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런 불안이나 갈등을 먹으며 악마가 자라난다고 생각 한다는 그는 악마가 서서히 성장해서 자신을 치러 오는 느낌을 강렬하게 느낀다고 했다. 특히 그 악마는 사랑에 빠져서 감정 변화가 굉장히 심할 때 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40대에 엄청난 사랑을 하며 무방비의 상태로 파괴적 사랑에 빠진 시인은 차라리 악마가 나를 완전히 없애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그런 생각이 지속되는 기간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기간을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란 문장으로 축약했다고 밝혔다.


시인의 말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듯, 시인은 모든 것을 바칠 만큼 누군가를 사랑했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네가 돌멩이를 내밀며/ 이걸 삼켜, 그러면/ 삼킬 생각이었어’.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돌멩이를 삼키라면 삼키려던 사람이 적어 내려간 활자는 파괴적이고 강력하며 조금은 무서운 듯한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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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오늘>의 화자는 극심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테다. 배를 부풀리며 심호흡해도 여전히 욕망의 그림자가 몸집을 키우며 화자를 몰아붙였을 것이다. ‘너’가 찾아오는 밤과 낮, 그 하루하루가 ‘극심한 오늘’이 되어 화자는 매일 두통으로 밤을 보낸다. 도저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너’를 보며 화자는 선택한다. 차라리 악마에게 자신을 맡기기로. 악마는 어디에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나를 보지 못하고 왜 여전히 나를 몰입의 상태에 두고 흔드는가. 왜 나의 젊음을 유예시키는가. 악마에게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는 이상 이 극심함은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 혹은 ‘너’. 둘 중 누구 하나는 사라져야 끝나는 극심한 오늘, 화자의 외침은 ‘너’를 향하지만, 끝내 그 외침이 향하는 곳은 결국 또다시 자신이다.

 

해당 시집의 첫 번째 시로 실린 <뱀이 되려 했어>에선 ‘너에게 나를 꽁꽁 묶어두고’, ‘네가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나 혼자 오래오래 지켜보려 했어’, ‘눈이 멀 때까지 너만 보려했어’라는 문장이 나온다. 화자의 사랑은 집착으로 점철돼, 역시나 조금은 무서운 듯한 사랑이다. 그러나 화자의 방식이 징그럽다거나 불쾌하지 않고, 패망한 사랑의 절절한 감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김개미 시인 특유의 화법 때문이다. 날카롭고 선명한 감정을 덤덤하게 써 내려가는 김개미 시인 특유의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시인의 감정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게 한다.


 

 

때로 인간도 한 인간의 신이라는 것을 신은 모른다


  

 

밤마다 소용도 필요도 없는 별이 뜬다는 것을

신은 모른다

별은 겨울이 다가오면서 매일 조금씩 커지고

비가 오고 나서는 더 많이 커지지만

그따위 사소한 것을 신은 모른다

별을 단숨에 달처럼 키울 수 있다는 것을

눈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따위 개인적인 것을

신은 모른다

인간은 인간이라서

인간인 게 싫을 때가 있지만

포기도 낙담도 허락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신은 모른다

하나밖에 없어서

그 하나를 지키려고

화장실에서 밥을 먹고

화장실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그따위 미천한 짓거리를

신은 모른다

때로 인간도 한 인간의 신이라는 것을

신이라서 울 수도 한숨 쉴 수도 무너질 수도 없다는 것을

신은 모른다

긍정과 낙관만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인 인간의

비참한 머릿속을

막 이사 온 옆집 사람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그따위 미천한 감정을

신은 모른다

희미해져가는 작은 것

그 옆에서

환하게 터지는 신음을

붉은 심장 속에 닥친 크고 높은 해일을

그따위 거룩하지 않은 현상을

신은 모른다


<신은 모른다>

 

 

시를 읽으며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신은 모른다>의 모든 문장은 '인간'인 내가 비참함을 느꼈을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다. 일면식조차 없는 막 이사 온 옆집 사람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라도 기대고 싶은 그따위 미천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리고 그따위 감정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같은 인간뿐이다. 해당 시는 신은 '신'이기 때문에 결코 알 수 없는 인간의 낱낱을 헤아리고 있다.

 

인간이 한 인간의 ‘신’일 때가 있어서, 무너질 수조차 없는 상황을 짚어낸 것은 시인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우린 꽤 자주 긍정과 낙관을 강요받는다. 시인은 인간이 매 순간 견디고 버티는 지난한 과정을 선연한 활자로 써 내려감으로써 인간을 위로하고 있다. 신에 대한 원망,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적어 내려간 문장이 위로되다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따위 개인적인 것’을 알아줬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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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내가 울면 별들이 아름다워져>에서 나온 눈물로 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던 시인의 말은 <신은 모른다>에서 다시금 언급된다. 별을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단숨에 달처럼 키울 수 있다는 문장을 통해 시인의 감정은 책장을 넘길수록 더욱 증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생생한 사랑의 감정을 꽉 눌러 담아낸 시집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시적 주체는 맹목으로 차 있다. ‘나는 나의 잘못으로만 잘못되고 싶다’던 화자가 사랑의 실패를 겪으면서 베이고, 다시금 살점을 채워 넣는 모습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신도 악마를 기다리고 있는가? 사랑, 우울, 상실, 실패... 어떠한 불안이나 갈등에 놓여있는가? 차라리 악마가 당신의 혼을 빼앗고, 없애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나.

 

당신의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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