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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가족의 평균을 정의할 수 있을까. 예컨대 가족 구성원의 숫자와 그 면면 혹은 가족 구성원간의 유대감과 거리감 등에 대해서 평균이라고 부를 만한 가족 모델을 구상해본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가족은 늘 어딘가 어긋나고, 부족하고, 때론 넘친다. 한 사람의 개인조차 쉽사리 정의할 수 없을 텐데(물론 우리는 개인의 성향을 정의하기 위한 어설픈 시도들에 자주 흥미를 느끼곤 하지만), 하물며 개인의 집합인 가족의 모습에 감히 ‘보통’이라는 기준을 붙이기는 어려울 것.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을 비틀어 인용한다면, 행복한 가정도, 불행한 가정도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 가족의 보통 법칙이다. 그리고 보통의 가족에 대한 또 하나의 평균적 법칙은, 어쨌든 핏줄로 이어진 가족의 구속은, 때론 끔찍할 정도로 질기다는 것이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보통의 가족>(2024)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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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너머의 가족


 

변호사 재완(설경구)과 소아과의사 재규(장동건)는 형제다. 각각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직업을 가진 두 형제지만,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재완은 높은 수임료를 받는다면 살인 사건 가해자 변호를 맡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물질주의적 인물이다. 반면 재규는 환자를 살린다는 의사의 본분을 위해 자신의 손해까지 기꺼이 감수하는 원칙주의적 인간이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 지수(수현)와 재혼한 후 늦둥이를 낳아 풍족한 삶을 누리는 재완과, 아내 연경(김희애)에게 치매 환자인 노모의 간병을 맡기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재규의 대비되는 생활수준을 통해 영화는 두 형제를 더욱 선명하게 구분하고 갈라놓는다.


관객은 영화 속에 각자의 윤리관을 투영한 채 두 가족의 모습을 평가하게 된다. 우선 재완과 그 가족의 경우.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막대한 부를 누리는 재완은 평범한 악인으로 그려진다. 유력 기업가의 자제인 형철(유수빈)의 변호를 맡아 명백한 고의적 살인을 과실로 포장해가는 그의 모습은 섬뜩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너무 평범한, 오직 수임료에 비례하여 법률 서비스가 거래되는 법조계 직업인의 모습을 재현할 뿐이다. 실제로 가정 안에서 재완은 여느 가장들과 마찬가지로 아내와 딸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가장의 역할은 그가 벌어오는 월급의 액수와 가족에게 보이는 집안에서의 모습이 전부일 수는 없다. 딸 혜윤(홍예지)이 어쩐지 인간적 감정보다 차가운 권력과 물질의 논리에 치우쳐져 있는 것은 가족에게 자상하지만 물질 앞에서 냉철한 아빠 재완의 영향일 테다.


반면 재규의 가족은 다른 느낌을 주는데,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의사이지만 상대적으로 소박한 가정환경에서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서 동질감을 자아낸다. 특히 해외 봉사활동에 진심을 다해왔으며, 치매 노인의 병간호를 하면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는 아내 연경의 모습은 어떤 존경심마저 느끼게 한다. 재규 부부는 물질적 가치보다 인간적 가치를 삶의 동력으로 삼아 살아가는 따뜻한 가족처럼 보여서, 그들이 재완의 젊은 새 아내 지수를 은근히 조롱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작은 결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지수를 향한 조롱과 질투에서 드러나던 은근한 배타성은 훗날 갈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때 학교폭력에 시달렸던 아들 시호(김정철)의 문제만이 가족의 아픈 상처인 것처럼 보이는, 어쩌면 평범한 두 가족의 모습. 그러나 재완과 재규의 가족 모두 보통의 가족 모델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고, 우리는 또다시 보통 너머, 아주 깊고 어두운 가족의 이면을 마주하게 된다.

 

 


가족은 가족을 알면서 모른다


 

재완의 초대로 모인 두 부부의 식사 자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노모를 요양원에 모시자는 재완의 제안에 재규는 강한 반대 의사를 비친다. 노모에 대한 지극한 사랑보다는 사회적 시선을 우려한 재규의 단호함과 고된 병간호를 끝낼 기회를 은근히 바라던 연경의 당황감은 그들 부부에게 씌워진 윤리적 포장에 조금씩 균열을 낸다. 그러나 재규는 재완의 직업적 윤리 의식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자신의 윤리적 포장을 다시 동여매고, 가족의 문제를 도맡아오며 층층이 쌓였던 연경의 불만은 지수를 향한 부정적 시선을 표출하는 방식으로만 다소 해갈될 뿐이다. 서로의 욕망을 몰랐거나, 혹은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던 재규 부부는 윤리의 장막 아래 그들의 이면을 여전히 숨겨둔 채 자리를 마무리한다.


신체의 유전적 형질을 이어받은 것이 부모와 자식의 생물학적 관계라면, 사회적 특성과 위계를 이어받는 것은 부모와 자식의 사회학적 관계다. 부모의 신체적 특징 일부가 자녀에게 발현되는 것처럼, 부모가 추구하는 사회적 태도와 삶의 방식 역시도 자연스레 그들의 자녀에게 이어지는 것. 혜윤은 재완의 욕망을 솔직하게 닮아 그녀에게 주어진 부와 권력을 무심하게 누린다. 반면 시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힘과 권력으로 강하게 대항하지 못하고 늘 주눅 들어있는데, 이것은 시호의 부모가 학교 폭력 가해자를 ‘윤리적으로’ 쉽게 용서했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문제는 사회학적 형질의 전달 상황을 부모는 미처 알 수 없으며, 완전히 통제할 수도 없다는 것. 욕망은 부모―자식으로 연결된 사회학적 관계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자주 변형되고, 또 왜곡된다. 두 부부의 식사가 있던 바로 그날, 부모들 몰래 파티에 참석했던 혜윤과 시호가 귀갓길에 마주친 노숙자를 무참히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자식들의 끔찍한 범죄 행위를 알게 된 두 부부는 충격에 빠진다.


광기에 가깝게 드러난 자식들의 폭력성은 체득된 강자의 우월감(혜윤)이거나 억눌렸던 약자의 포효(시호)처럼 보인다. 그것은 부모가 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몰랐던, 아이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키워왔던 세계의 모습이다. 부모가 몰랐던 아이들의 세계가 열렸을 때 부모가 몰랐던 부모의 세계가 함께 열리고, 마침내 가족이 함께 답을 구해야 할 문제가 제기된다. 풀이 과정은 여러 개일 수 있으나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구속된 이들이 합의한 오직 단 하나의 답안만을 제출할 수 있는 어려운 문제. 그것은 우선 ‘보통의 가족’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논의를 시작하게 된다.

 

 


오직 부모만을 위한 풀이


 

자신의 자식들을 범죄자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게 할 것인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부모들은 우선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먼저 인정의 과정. 혜윤이 자신의 범죄 사실에 대하여 (남의 이야기를 빌리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때, 재완은 당장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혜윤의 태도가 자신이 변호를 맡았던 수많은 가해자들이 법률 상담을 요청하던 태도와 유사했기 때문이었을 것. 별다른 사실 확인도 없이 혜윤의 범죄를 의심하며, 당장의 대책을 먼저 고민하는 재완의 모습은 양심보다 물질에 초점을 맞춰 삶과 사회를 대하던 태도를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대로 대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재규의 경우 윤리적 강박과 같은 태도를 먼저 보이는데, 그는 당장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라는 윤리적이며 동시에 폭력적인 태도(“맨날 처맞기만 하던 새끼가 왜 사람을 치고 지랄이야!”)로 자신의 아들을 대한다. 재완과 재규는, 많은 부모가 그렇듯, 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방식을 통해 범죄 사실을 인정한다.


문제를 인식(혹은 인정)했으니, 이제 가족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풀이를 시작해야 한다. 풀이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아내들이다. 연경은 아들 시호를 감싸며 범죄 사실을 덮어주려 한다. 그녀는 무작정 자수를 요구하는 재규를 필사적으로 막아선다. 시호를 범죄자로 만드는 대신 차라리 내가 죽거나 혹은 당신이 죽으라는 그녀의 절규는 절박한 모성애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정답이겠지만, 우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윤리와 인류애로 눈물졌던 자신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듯한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아들의 인생을 위해 타인의 생명이 가진 가치마저 부정하는 연경의 태도 변화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도덕적 객관의 시선으로 고민하는 지수(“지금으로서는 할 일이 없으니까”)와 대비되면서 더욱 끔찍해진다.


부모가 낸 문제를 풀면서 아이는 성장하고, 아이가 가져온 숙제를 고민하면서 부모 또한 변화한다. <보통의 가족>의 경우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이들이고 문제를 푸는 것은 부모들의 몫이다. 아이들이 내준 문제를 풀어가면서 부모들은 곧 스스로의 문제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그 지난한 풀이의 끝에서 부모는 성장할 수도 혹은 끝내 무너질 수도 있을 테다. 재완은 일말의 죄책감조차 없는 혜윤의 섬뜩한 모습에서 물질주의에 빠져있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동안 윤리와 생명의 가치를 부정하며 타인의 영혼을 죽여왔던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으로서, 그는 사랑하는 딸 혜윤을 자수시키기로 한다. 반면 재규는 그동안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시호에 대한 깊은 죄책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재규는 그가 살려온 여러 사람의 생명과, 연경과 함께 지금껏 해왔던 선행을 대가로 바쳐 시호의 범죄를 영원히 덮어주기로 한다. 그의 아들을 범죄자로 만들겠다는 이를 기어코 죽여 버려서라도.


아이들이 던진 난제를 풀면서 재완과 지수는 딸과 함께 기꺼이 앓을 각오로 성장했고, 재규와 연경은 아들과 함께 차마 앓을 수 없어 무너졌다. 너무 많이 해준 것을 되돌리거나(재완), 너무 못 해준 것을 갚아주려는(재규) 부모의 마음은, 비록 방향이 다를지라도 그 절실함은 동일한 것인가. 자식을 위해 스스로의 가치와 신념, 마침내 삶까지 필사적으로 던질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보통이며, 자식은 그런 부모의 간절함마저 쉽게 이용하고 속일 수도 있는 것이 보통의 가족일까.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들을 위해 선을 위선으로, 악을 위악으로 기어코 전복해내는 고약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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