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겨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때쯤이면 토미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뭐 하러 기억하겠는가? 이제껏 한 번도 기억한 적이 없었던 것을.
_7쪽, <프롤로그>에서
내가 사라지는 생일
생일은 흔히 기쁜 날로 여겨진다. 축하를 받고, 케이크를 자르고,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일은 일 년 중 가장 쓸쓸해지기 쉬운 날이기도 하다. 수많은 평범한 날들 가운데 유독 그 하루가 특별해질 수 있는 이유는, 결국 ‘나’라는 존재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자신이 얼마나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은근히 확인하게 되는 것이 무섭기도 하다. 가끔은 그저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가는 날이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잠시 사라졌다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에 스며들 수 있다면.
《내가 없는 나의 세계》의 주인공 토미는, 그런 바람을 현실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잔혹한 형태다. 그는 매년 생일이 되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그와 나눴던 모든 기억을 잃는다. 기록도, 사진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토미에게 생일은 축하의 날이 아니라 ‘재시작’의 날이다. 존재 자체가 초기화되는 순간인 것이다.
한 살이 되는 날 부모님에게 잊힌 토미는 위탁시설 '밀크우드 하우스'에 맡겨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셸 선생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다. 관심과 보호, 사랑이 필요한 어린 시절 그는 다행히 좋은 어른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재시작 이후에도 사람들은 비교적 허물없이 그를 받아주었다. 그 울타리 안에서, 토미는 나름대로 다시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시기의 토미는 아직, 세상이 자신을 완전히 밀어내지 않는다는 감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1년이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자각하게 된다. 노력도, 관계도, 감정도 모두 임시 저장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은 그를 조금씩 무너뜨린다. 특히 첫사랑 캐리가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경험은 결정적이다. 좋아했던 사람에게서, 함께 쌓아온 시간이 아무 의미도 없게 되는 순간. 토미는 깊은 방황에 빠진다.
어차피 사라질 것들이라는 생각은 사람을 쉽게 무기력하게 만들고, 토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토미는 책을 좋아하는 탓에 곧잘 좋은 성적을 받아오는 학생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성적표나 학교 생활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토미는 삶을 방치하며 흘려보내다, 몰래 술을 마시고 큰 사고를 당한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법
심하게 다친 토미는 수 달간 병원 신세를 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조쉬는 무기력하던 토미의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든다. 같은 병동에서 나눈 대화와 웃음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진정한 우정을 경험한다. 생일이 지나면 조쉬 역시 자신을 잊을 것을 알면서도, 토미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마음에 품는다. 지켜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약속이었지만, 그것은 토미에게 삶을 붙잡는 실마리가 된다.
이후 토미는 자신의 운명 속 미묘한 틈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남긴 흔적은, 재시작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병원의 화단에 투박한 선인장을 심고, 밀크우드 하우스를 정성스럽게 가꾸고, 조용히 공간을 바꿔놓는다. 아무도 '토미의 것'으로 명명하지 않는 변화들이지만, 그것들은 분명 세상 어딘가에 흔적을 남긴다. 토미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삶은 더욱 가혹해진다. 밀크우드 하우스를 떠나 자립해야 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난관이다. 행정적으로 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 가깝다. 신분증을 만들고,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계좌를 개설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자신의 신원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곧, 사회로부터 신뢰받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는 보호와 이해가 있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설명과 증명이 필요해진다. 토미는 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그러나 토미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씩, 아주 천천히,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성인이 된 후, 우연히 들어간 술집에서 조쉬와 다시 만나는 장면은 이 소설의 가장 따뜻한 순간 중 하나다. 조쉬는 매번 토미를 잊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번 다시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관계는 다시 만들어진다. 두 사람은 결국 함께 가게를 운영할 만큼 깊은 사이가 된다.
이 반복되는 ‘재시작’은 자칫 피로감을 안길 법도 하다. 그러나 토미의 우직한 태도는 모두를 매료시키며 그런 우려를 자연스럽게 지워버린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이유로 낙담하거나 삶을 방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번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애쓴다. 더없이 소중한 사람들에게 간직한 깊은 애정을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 속에서도 토미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대신 그 애정을 품고 관계를 쌓아나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 역시 어느새 토미를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캐리와의 재회. 자신을 전혀 모르는 상태의 캐리와 사랑을 시작하는 과정은 조심스럽고, 때로는 아프다. 그동안 토미는 리셋된 세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 재시작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늘 간신히 삶을 지켜왔다. 하지만 캐리와의 인연 역시 리셋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토미는 처음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보이며 결혼을 청한다. 우주의 규칙을 어느 정도 ‘속이는 법’을 익힌 이후에도, 토미의 삶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 속에서의 구혼은 토미와 캐리 모두에게 모험이나 다름없다. 망설이는 캐리의 모습에 토미는 덧붙인다. 그것은, 토미가 평생 품어온 염원을 마침내 드러낸 순간이었다.
“난, 다른 사람들이 갖는 걸 나도 갖고 싶을 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갖게 되는 것들을 말이야. 난 변화를 만들려고 애써왔어. 작은 것들이야 남겨둘 수 있었지. 사소해서 아무도 안 보는 것들이었어. 낙농장의 정원이랑, 직장에서 만든 변화 같은 거. 학교에서 썼던 바보 같은 이야기처럼, 내가 남겨놓았다는 걸 나도 모르는 것들 말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더는 안돼.”
_392쪽, <21>에서
내가 기억하는 나의 세계
재시작의 운명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 온 토미.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자리를, 재시작에 휩쓸리지 않을 단단한 보금자리를 가지고 싶어하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진정으로 이해받고, 기억되고,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가장 솔직하고 연약한 소망.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그 소망을 처음으로 투명하게 내비추는 토미의 말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먹먹함을 불러온다.
그래서일까. 토미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인생 어딘가에서 한 번쯤 ‘토미 같은 시기’를 지나온다. 익숙했던 자리에서 벗어나,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던 순간들. 한때의 전부가 과거가 되어버리는 경험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증명하고, 다시 관계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없는 나의 세계》는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선다. 이 소설은 ‘기억이 지워지는 소년’의 이야기를 빌려, 우리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놀라울 만큼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보호받던 시기를 지나, 점점 더 많은 책임과 선택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삶. 제도와 사회, 관계 속에서 스스로 자리를 만들어가야 하는 시간들 속에서 토미의 성장은 곧 우리의 성장과 겹쳐지게 된다. 특별한 설정 위에 쌓아올린 탄탄한 현실감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가장 참신하고 동화적인 방식으로 다시 들려준다.
한 인간은 온전히 홀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관계와 순간들이 엮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아무리 토미에 대한 기억이 세상에서 지워져도, 언제나 아이들을 향한 온정으로 그를 품어주던 미셸이 있었고, 쾌활함을 잃지 않았던 조쉬가 있었고, 서툴게 다가가는 소년의 마음에 기꺼이 응하는 캐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만큼은 결국 토미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토미가 토미로서 존재했고, 그들이 그들답게 살아갔기에, 인연은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내가 없는 나의 세계》는 말한다. 어쩌면 기억되는 삶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가라는 질문이라고. 기억되지 않아도, 기록으로 남지 않아도, 우리는 분명히 살아왔고 사랑했고 선택해왔다. 그 시간들은 나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되지 못하는 소년의 분투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결국 스스로를 잊지 않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매번 사라지는 운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한 소년의 기록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의 자신을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나요?”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떠오를 이 질문은 어쩌면 그 무엇보다 깊은 위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