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풍경에 묻혀 영원하도록 - 바우키스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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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번에 존재하고 뒤섞이는 장면들은 누구나 언제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작별의 순간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를 암시한다. 말이 아닌 음악으로 존재했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작별의 순간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그 자세란 사물이 풍경이 되어가는 모습에 고요하게 귀 기울이기.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이 있는 것들을 사랑하기. 그럼으로써 이 순간을 영원히 지속시키기.
- '바우키스의 말' 심사평 중
영원과 형체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은 곳을 방문한 날에는 꼭 엽서를 몇 장 사들고 온다. 순전히 내 취향인 것일 때도 있고, 혹시 모를 수신자의 취향을 반영한 것일 때도 있다. 사실 영영 부쳐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들인데도 꽤나 고민이 된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쁜, 그렇지만 너무 흔하지는 않아서 곧장 특정한 기억의 매개체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만한 것들. 그렇게 마음대로 사모은 엽서들은 바인더에 정갈히 끼워놓은 모양새만으로도 퍽 만족감을 준다.
일단 한번 정리를 해두고 나면, 이후에 그걸 꺼내보는 건 사실 아주 가끔이다. 가령 요즘처럼 갑자기 쌀쌀해져서 시간의 흐름을 새삼스레 체감하게 되는 시기라든가. 일 년 중에 몇 안 되는 날이다. 그렇게 간만에 들춰본 기억들은 언제 들여다보든 아주 고요히 정리되어 있다. 묘한 기분이 든다. 정작 당시의 벅참은 내 안에서 빛이 바래 있는데, 지면에 인쇄된 풍경은 너무 선명해서 그때의 마음과 눈앞의 물성이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손끝의 즉각적인 감촉과 마음 속 희미해진 감상이 이루는 불일치. 그걸 생각하면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싶다는 처음의 의도, 그러니까 내가 굳이 엽서를 사 모음으로써 이루려고 했던 작은 목표는 번번이 좌절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그러쥔 것들로 난 무얼 하고 싶었던 걸까. 약간의 허탈함이 들면 종종 엽서가 끼워져 있던 투명 필름의 틈을 벌리기도 한다. 보내줄 때가 되었어, 원래 기능대로 편지라도 써 보내자, 하고.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난관이다. 낯간지러운 손편지를 건네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솔직해지니까. 정확히는, 너무 많은 마음이 한꺼번에 부글거려서 도통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다. 갓 건져올린 감정을 적당히 가라앉힌 채로,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는 채로 문장에 담아내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매번 언어의 한계를 체감한다.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꼭 들어맞는 말 같은 건 도통 찾기 힘들고, 어떤 단어를 고르든 발화의 순간 마음은 처음의 생명력을 조금 잃고 만다.
기억과 엽서. 마음과 편지. 각각의 쌍들이 엮인 모양새가 어쩐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하지만 가장 분명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을, 선명하지만 어딘가 퇴색되어 가는 것에 옮겨내는 일. 태초의 시가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고안된 긴 노래였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의 우리가 그 노래의 가장 순수한 원형을 알 수는 없는 것처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것이 어딘가 불완전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형체의 힘을 빌리고 싶어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한때 가까웠던 누군가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24p)"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든 종류의 작별을 어려워하고.
'바우키스의 말'은 그런 영원과 형체 사이에 놓인 이야기다. 갖춰진 동시에 사라진 형체, 그렇게 녹아들며 사라짐으로써 달성된 영원에 대한.
바우키스의 말
언젠가 인간 세상에 몰래 내려온 신들을 융숭히 대접한 노부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낯선 나그네에게 가장 귀한 것을 선뜻 내어주려던 부부를 신들은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고자 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한날 한시에 눈을 감는 일이라던 부부. 그들의 이름은 바우키스와 필레몬이었다. 그리고 신들은 그 애틋한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어느 한쪽이 떠나고, 다른 한쪽은 남겨지는 작별의 순간 대신 부부는 각각 보리수와 참나무가 되어 영원히 그 자리에 함께 서 있게 되었다.
이들 부부는 '바우키스의 말'에서 각각 '나'와 '모형 비행기 수집가'로 변용되어 등장한다. 둘은 어느 겨울밤 우연히 처음으로 마주치지만, '나'는 그 만남과 동시에 직감한다. "우리는 이대로 작별 인사도 없이 작별하게 되리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24p)"고. 이후 '나'는 '모형 비행기 수집가'에게서 받은 구형 타이프라이터를 가지고 그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자 하지만, 편지를 쓰겠다는 마음은 나무가 되어 번번이 '나'의 입을 뒤덮고 만다.
그제야 깨달은 것인데, 내가 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면, 그 말은 내 편지가 나를 영영 떠난다는 의미였다. 내게서 나온 말은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혹은 나는 기억을 상실한 말과 다름없게 되리라. 그리하여 수십 년이 흐른 후, 어쩌면 나는 어딘가에 남아 있을 내가 쓴 편지들을, 내 말의 조각들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연히 대부분의 편지들은 폐기되었고 받은 사람의 기억에서조차 떠나버렸으므로, 모든 시도는 헛될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충동에 사로잡혀 썼던 편지들을 떠올렸고, 그 편지들은 타이프라이터가 아니라 손으로 쓴 것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수치심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쓴 편지들이 나를 다시 이끄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은 몸을 잃은 영혼과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우체부가 되어 내 편지를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p.28.
계속해서 편지 쓰기에 실패하던 '나'는 문득 편지를 보내는 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언어는 분명 나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한번 떠나보낸 것이기에 그것은 온전히 나에게 속하지 못한다. 동시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상대에게 온전히 속하지도, 또 그에게서 영원히 간직되지도 못한다. 그렇게 흩어진 말들은 "몸을 잃은 영혼"이다. 이는 발화의 대가다. 형체를 갖추었다는 것은 반대로 언젠가 사라질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존재한 적 있는 것들만이 사라질 수 있다.
한편 '나'는 '모형 비행기 수집가'와 함께 "입 없이도 하나의 어휘가 저절로 말해질 때까지(36p)" 나무를 포옹하기도 했다. 나무와 한 몸이 된 것 같은 모양새로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면, 이는 '나'의 어휘가 비로소 '해방'되는 순간이 과연 어떤 형태로 실현될지 예고하는 장면 같기도 하다. 아직 잠재태로 존재하는 말, 다시 말해 발설되지 않았기에 아직은 소멸하지도 않을 바우키스의 말을 품은 채로, '나'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뮬강의 미술관 옆에 있는 외딴 오두막을 찾아가기 위해서. '모형 비행기 수집가'는 언젠가 머물 곳이 없으면 이곳에서 지내라며 '나'에게 오두막의 열쇠를 건네준 적이 있었다.
어느 순간 행적이 묘연해진 노인이 살던 작고 낡은 오두막. 그 오두막은 사라지는 것들을 두고 볼 수 없던 한 예술 애호가가 사들인 곳이기도 했다. 작별을 슬퍼하는 어떤 이가 무작정 붙잡아둔 공간에, '나'는 필연적인 작별을 맞이하러 간다. '나'는 그 필연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자신 역시 예외가 아님을 알았다. 그의 자매가 가족을 떠나고, 자신 역시 마지막까지 어머니의 곁에 있지 못했듯. 어떤 관계든 영원을 담보할 수 없고, 선명한 이름을 가진 관계일수록 그것의 '없음' 역시 뚜렷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작별은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게 될 가장 확실하고도 결정적인 사건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언젠가는 누구의 곁을 떠나게 되는 걸까. 가족이 떠난, 혹은 가족을 떠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을 잘 이해하며, 나 또한 그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안다.
p.39
'모형 비행기 수집가'는 오두막의 열쇠와 구형 타이프라이터 외에도 '나'에게 "좀 더 살아 있는(37p)" 무언가를 안겨주고자 했다. '음악가'와 그의 가족을 소개해준 것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음악가'는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를 자신의 즉흥 퍼포먼스에 초대한다. 사람들이 내뱉는 단어들이 음악의 일부가 되는 퍼포먼스. 그의 연주는 바우키스의 말 역시 음악의 차원에서 해방될 수 있게 한다.
어떤 말이 말 그 자체가 아닌 음악의 일부로서 존재할 때 비로소 발화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환상적인 동시에 어렴풋하기도 한 이 장면을 계속해서 그려본다. 신화 속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소원은 어느 누구도 떠나고 남겨지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무의 형태로 영원히 함께하게 된 부부의 모습은 왜 작별이면서도(잘 가요, 내 전부인 사람! - 그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기도 했으므로) 작별이 아닌 것일까. 그들의 마지막이 영원의 '실패'로서의 작별이 아닌, 영원의 '이형태(異形態)'로서의 작별일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건 그들이 '너의 나, 나의 너'로서 존재하는 일을 멈추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떠나보내는 사람을 만드는 건 남는 사람, 남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떠나는 사람이 아니던가.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성립시키고, 또 작별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부부가 떠나보내는 것은 언어의 형태로, 이름의 형태로 못박인 '서로의 서로'였을 것이다다. 너의 나, 나의 너로서 존재하던 서로와는 작별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또 영원히 존재할 것들에 오롯이 녹아든다면 그들 역시 영원할 수 있다. "씨앗과 곡식과 강물과 바람(53p)", 그리고 "햇빛과 서리, 겨울과 한여름, 더위와 나무와 들판(53p)", "밤과 그리고 낮(53p)"의 형태로.
서로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어도, 언젠가 "있는 것"의 형태로 되돌아오리라는, 영원한 순환에 대한 담담하고 담대한 믿음. 그래서 작별의 순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 풍경을 이루는 소리의 일부가 되는 것(47p)"이다. 모든 현실의 형태를 넘어서서, 특정하고 유한한 '말'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일. 어떠한 형태든 '있음'이 분명하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선언하는 일.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는 일.
'바우키스의 말'이 음악의 일부로서 비로소 발화될 수 있던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나의 '말'은 너만을 향하게 되는 순간, 단단하지만 온전하지는 못한 것이 된다. 그 목적지가 선명한 만큼 언젠가 바래버릴 것이 된다. 그것이 발화되었다는 사실,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 "몸을 잃은 영혼"이 되어버린 그것들을 감싸안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그 말들을 소리의 풍경 속에 묻는 것이다. 모든 말들을 자신의 일부로서 공평하게 묶어놓는 음악의 질서 아래, 모든 수식을 걷어낸 '소리'를 순수하게 뱉어놓는 일. "한번 공명한 소리는 사라지지 않(52p)"는다.
이제 그녀는 영원히 이 자리에 머물 것이다. 그 무엇도 떠나게 하지 않는다. 손바닥에 피어나는 초록빛 이끼.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감정과 느낌, 기억과 생각은 모종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네가 있었구나. 최후의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들어온 초록 강둑의 한 줄기 보랏빛 광선은 눈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p.53
처음의 엽서와 편지를 다시 떠올려본다. 작별이 무서워서 억지로 모양을 잡아두었던 마음들도 떠올려본다. 바우키스의 말처럼, 점 하나를 중심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끝없이 깊어지는 심연처럼, 어떤 말과 감정과 느낌과 기억은 꼿꼿이 한 점을 이루며 밑으로, 또 밑으로 빙글빙글 돌아내려간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나의 무엇'이 흩어지는 일들이 두렵지 않다. 어떤 차원에서라면, 더이상 무엇도 떠나보낼 일 없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황수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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