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현대사》, 야마모토 조호, 마르코 폴로, 2025.
얼마 전 한국을 찾아 준 외국인 친구와 함께 서울의 관광지들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막상 살다 보면 쉽게 지나치는 풍경이지만,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관광지는 늘 시대의 기류를 가장 먼저 포착하고 반영하는 장소가 아니던가. 특히 눈에 띄는 건 매대를 가득 채운 케이팝 굿즈들, 그리고 그것을 흥미롭게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이었다. 원래 이렇게 북적였나 싶기도 했는데, '케데헌' 흥행에 힘입어 지난달 남산 방문객이 무려 50%가 늘었다고 했다. 조금은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한류' 같은 표현을 저항 없이 떠올렸다.
BTS, 블랙핑크와 같은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글로벌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은 사실 이제 낯설지만도 않다. 하지만 이번처럼 그 인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면 여전히 신기하다는 감상이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나 역시 케이팝의 오랜 팬이지만, 이처럼 케이팝이 기존 매니아층을 넘어 세계적 대중문화의 한 축이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덧붙여 요즘 들어 유독 실감하는 건, 이 열풍이 단순히 음원 차트나 콘서트의 성황과 같은 음악 시장 안에서의 유행을 넘어, 문화 생태계 전체를 움직이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아이돌의 퍼포먼스나 패션을 재해석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뮤직비디오 전광판이나 아티스트의 생일 축하 광고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도시 경관의 일부가 되었다. 그뿐일까? 각종 브랜드의 케이팝 콜라보 메뉴, 굿즈 등은 물론 VR 콘서트, 케이팝 로케이션 투어 등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콘텐츠까지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이는 분명 특정 장르나 아티스트의 인기 정도로는 치부할 수 없는, 거대하고 지속적인 흐름이다. 무엇이 이를 가능케 한 걸까? 그 궁금증으로 펼치게 된 책이 바로 『K-팝 현대사』였다.
'국경을 넘는 법을 연습해 온 문화'
저자 야마모토 조호는 한국 대중문화 연구자이자 오랜 케이팝 팬으로서, 지금의 케이팝이 어떻게 현재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는지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제목에 '현대사'와 같은 명칭이 쓰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그에게 케이팝은 돌연한 탄생물이 아니라, 근대 이후 한국 사회가 겪어온 우여곡절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일본인 연구자의 저서이지만, 그의 논의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놀라울 만큼 섬세하고 적확하다.
『K-팝 현대사』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요소가 모두 맞물린 채 그려지는 '문화적 생태계'의 장으로서 케이팝을 바라본다. 각종 통계나 수치를 통해 성공 신화를 설명하는 듯한 접근법 대신, 한국의 대중음악이 거쳐온 과정과 맥락에 집중하는 본문이 특징적이다. 식민지 시절 일본 음반사를 통해 유입된 서양 대중음악, 전후 미국식 팝 문화의 확산, 검열과 산업 규제를 거치며 축적된 방송 시스템, 그리고 IMF 이후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의 폭발적 성장과 온라인 팬덤의 탄생까지. 저자는 현재의 케이팝 시스템을 가능케 한 기반이 적층되어 온 양상을 지루하지 않게 풀어낸다.
그렇게 시간의 층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분석을 읽어나가다 보면, 처음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왜 하필 한국의 대중음악이 지금과 같은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전세계를 사로잡은 케이팝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K팝의 또 다른 강점은, 한국이 외래 음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체득한 이종혼종성이다. (...) 19세기 서양 음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부터 한국은 유럽과 미국, 일본 등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이고 이를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해 왔다. K팝 역시 다양한 음악 문화가 혼합된 결과로 탄생한 것이다.
먼저 케이팝은 격변하는 역사 속 수용과 재창조를 거듭해 온,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경을 넘는 법을 연습해 온 문화'이다. 축음기와 라디오의 보급을 통해 서양 음악이 조선에 도입된 이래, 음악인들은 식민 지배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그 역량을 키워나가며 한국 대중음악의 기반을 다졌다. 해방 이후 한국 대중음악은 미국식 팝과 일본 대중가요의 영향을 동시에 받아들이며 발전했고, 이 시기 남진, 나훈아와 같은 '스타 가수'의 등장은 새로운 팬문화를 형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80년대에는 소방차, 김완선과 같이 해외 스타의 퍼포먼스를 한국식 무대로 재해석하는 아티스트들이 등장했으며, 90년대에는 미국식 댄스 가수의 역동성과 일본식 아이돌의 매력을 모두 갖춘 1세대 아이돌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다면성은 오늘날의 케이팝 아티스트들에게로까지 이어졌으며, 비주얼과 가창, 퍼포먼스를 모두 갖춘 케이팝 아이돌의 '팔각형' 매력은 글로벌한 인기를 견인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케이팝은 외부의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형하며 '살아남는' 법을 배운 문화다. 그렇게 모방도, 단순한 수용도 아닌, 제3의 음악 문화로서 케이팝은 세계 어디서든 향유될 수 있는 생존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1980년대에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며 싸운 젊은 세대에 이어, 1990년대의 젊은 세대(X세대)는 문화적, 사회적 해방을 요구하며 댄스 음악을 매개로 싸웠다. 가사 검열 제도와 같은 제도적 억압, 그리고 패션 등 젊은이들의 문화를 규제하려는 관습적 억압에 맞서기 위한 원동력이 된 것이 바로 한국의 댄스 음악이었다.
일본의 팬들은 '혐한'적 시선을 통해 K팝을 부정하는 주변의 사람들과 갈등하고 대립하며, 혹은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팬 활동'을 지속해 온 것이다. 이러한 '혐한' 이데올로기와 가족 내 남성 중심적 권력관계에 대한 소박한 저항은, '싸우는 대중음악'으로서 형성된 K팝이 일본 사회에서 도달한 새로운 문화적 형태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케이팝은 사회적 억압과 불안에 맞서는 저항적 음악으로서도 독특한 호소력을 갖췄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격변 속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해방을 요구하던 젊은이들은 그 욕망의 출구로서 댄스음악을 즐겼고, 각종 제도적 억압에 맞서던 이 시기의 대중음악은 단순한 유흥을 넘어 '자유에의 의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저항 정신은 90년대까지도 뚜렷이 이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케이팝 산업을 이끌고 있는 3대 기획사(SM, YG, JYP)의 창립자들 역시 모두 이러한 80~90년대 저항적 청년문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SM의 이수만, YG의 양현석, JYP의 박진영, 이들 모두 당시 제도권이 금기시하던 서구식 사운드나 파격적 퍼포먼스를 한국식으로 재해석했던 세대였다. 그들이 세운 기획사들은 이후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케이팝을 세계화했지만, 그 근저에는 억압적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의 표현 방식을 구축하려 했던 청년기의 저항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싸우는 대중음악'의 성격은 케이팝의 저변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정서는 국경을 넘어, 다른 사회의 억압과도 공명했다. 가령 저자는 한일관계 냉각기 속에서도 케이팝이 일본 시장에서 굳건했던 사례에 대해서도 위의 속성과 관련된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한다. 그는 일본의 팬들이 ‘혐한’ 정서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케이팝을 향한 애정을 숨기거나 방어해야 했으면서도, 팬 활동을 이어간 것이 곧 저항적 음악으로서의 케이팝의 성격이 발현된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그렇게 케이팝은 억압에 저항하는 감수성을 본질로 삼고, 소박한 일상의 차원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한 투쟁’을 가능하게 한다.
앞날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는, K팝이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형성해 온 이 순수하고 솔직한 메시지성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 1990년대에 형성된 '싸우는 대중음악'은 K팝의 세계화에 있어서 지금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흩어진 사회를 다시 잇고, 잃어버린 타인과의 공감,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을 되살리려는 외침. 그것이 바로 K팝 안에 담겨 있다. 이건 단순히 내수 시장이 좁기 때문만이 아니며, 정부가 지원해 주기 때문만도 아니다. (...) K팝은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식민지 지배, 전쟁, 독재, 그리고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같은 사회적 고통과도 정면으로 마주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고, 자유를 갈망해 왔다. 그렇기에,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K팝을 듣고, 그 속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특유의 적응력과 호소력으로, 그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목소리를 담아내는 케이팝. 오늘날 전세계의 젊은 세대가 케이팝을 들으며 공명하는 것은, 단지 멜로디나 비주얼의 매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속에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현실의 억압에 맞서는 법을 배워온 문화의 기억이 녹아 있다.
K, 자기표현의 음악문화를 이끌다
『K-팝 현대사』는 단순히 한 음악 장르의 성공사를 나열하지 않는다. 저자가 일본인 연구자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성실한 문장들, 그 속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건 결국 끊임없이 외부의 변화에 반응하며 자신만의 길을 다져온 한국 대중음악의 생존기, 끊임없이 자유와 자아를 모색해 온 이들의 서사다.
오늘날 K팝은 더 이상 특정한 사운드나 연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기획되고 글로벌하게 전개되는 자기표현의 음악문화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음악문화를 현대사의 다양한 도전과 불확실성을 뚫고 이 음악문화를 형성해 온 주체가 바로 'K', 한국이다.
저자가 지적했듯, 오늘날의 케이팝은 이제 단지 ‘세계로 수출된 한국 음악’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케이팝의 리듬에 몸을 맡기지만, 그들은 어쩌면 ‘한국의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불안과 열망을 대변해 줄 하나의 언어를 듣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국경과 언어, 이념의 경계를 모두 넘나드는 공용어로서의 케이팝. 그 언어의 모국으로서 'K'는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나가게 될까?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쓰이고 있는 그 답을, 앞으로도 쭉 지켜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