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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듣는 이야기는 왜 다 기억하는 이야기일까"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조바심 많은 성격은 글을 대할 때도 여전해서, 글로 인해 빚어지는 오해 혹은 불완전한 소통에 대한 두려움을 꽤 오래도록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쓴이의 손을 떠난 글이 어떻게 읽힐 것인지의 문제는 더 이상 그의 영역이 아니라는 정론을 알면서도, 함축적인 시어들을 앞에 두고 있자면 막연히 겁이 났다. 시 특유의 알듯 말듯 한 표현들을 진정으로 읽어내기엔 내가 너무 무딘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어렴풋이라도 시를 읽어내고 있으면 정말로 무언가 '알 것 같은' 순간이 종종 찾아왔다. 이 순간은 내가 예전보다는 조금 더 거침없이 시집을 집어들 수 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알 것 같다'는 말은, '사실 그건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일 때가 있으니까. 시어 뒤에 자리하고 있을 누군가의 시간이 나의 것과 유사할지도 모른다는 짐작, 나와 같은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나뿐인 건 아니라는 단서를 마주하면 반가움에 자꾸 그 얼굴 같은 말들을 매만지게 되었다. 아주 오래된 외로움도 씻겨나가는 순간이었다.

 

송정원의 첫 번째 시집, 『반대편에서 만나』를 펼쳤을 때도 이런 위안의 순간은 어김 없었다. "송정원의 시는 알 것 같은 데에서 시작하여 알 것 같은 흐름으로 진행된다"는 임승유 시인의 추천사처럼, 일부러 애쓰지 않고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은 시인의 세계는 나를 힘에 부치게 하지 않았다. "잃기 쉽고 생기기 쉽고 꺼지기 쉽고 솟기 쉬"(「그해 여름 얼음」)운 여름이었지만, 이미 알 것 같은 기억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소모감보다 동질감이 앞섰다. 자꾸 곱씹어도 불쾌히 땀이 흐르지 않았다.

 

 

모르는 여자가 갑자기 다가와

내 어깨를 움켜잡고

자신의 꿈을 쏟아낸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다 기억하는 이야기일까

 

여자의 꿈이 팔을 뻗어

내 가슴을 비튼다

 

여자의 눈물이

내 눈에서 터지고


- 「아사비케이시인」 중

 

 

아사비케이시인, 혹은 드림캐쳐. 악몽을 쫓아준다는 이 신묘한 주술품의 작용 방식은 시의 원리와도 닮아 있다. '기억을 쓴다'(「4인용 1인 식탁」)는 시인의 말처럼, 시를 쓴다는 것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을 글로 매어두는 일이다. 깨고 나면 잊어버리는 꿈 중에서도 좋은 것만을 붙잡아두듯, 지나고 나면 곧잘 희미해지는 기억 중에서도 간직해야 할 것을 남기는 것이다(아사비케이'시인'의 끝 두 글자는 재미난 우연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간직하려는 것이 꼭 좋은 기억일 필요는 없다. 매일 좋기만 할 수는 없다는 세상의 이치 속에서 매일 외롭지라도 않으려면, 하늘 아래 비슷한 슬픔을 가진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걸 확신하기 위해 가끔은 슬픔을 간직해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기억이 눌려 담긴 시어들은 처음엔 '꿈'결처럼 어렴풋하고 '쏟아'내지듯 급작스럽다. 이 말들은 '모르는 여자'의, 일면식도 없이 글로써 겨우 만난 누군가의, 그저 타인인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담긴 것이 곧 자신의 기억이기도 하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때가 있다. 낯선 언어를 매개로 익숙한 기억을 한번 불러내고 나면 그 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여자의 꿈이 팔을 뻗어 내 가슴을 비'틀고, '여자의 눈물이 내 눈에서 터'진다.

 


 

경계에 살다


 

 

그는 테두리에 사는 사람 

 

(...)

 

그가 있는 곳을 안에서는 바깥의 시작이라 불렀다/밖에서는 안의 끝이라 불렀다

 

테두리로 밀려난 사람이 있다/테두리에서 버티는 사람이 있다

 

- 「테두리에 사는 사람」 중

 

 

그는 기수 지역에 산다

 

더는 강이 아닌/아직 바다는 아닌

 

경계에 사는 것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일

 

흔들림에 대해서라면/언젠가 끝난다고 믿는 것보다/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차라리 덜 절망적이다

 

- 「기수 지역」 중

 

 

시인이 남긴 여러 기억들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을 꼽자면 그건 바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계'의 이미지였다. 안과 밖, 강과 바다, 어떤 범주에도 확실히 속하지 못하고 그 사이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 면이나 공간이 아닌 겨우 선에 사는 사람은 까치발을 딛고 버티듯 불안할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스몰과 미디엄 사이의 우주'(「내게 맞는 옷」)를 찾으려다 주의를 받고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스몰입니다'라며 범주에 들어가길 선택한 화자도 있는 반면, '그'는 이런 생활이 '언젠가 끝난다고 믿는' 대신 경계 위 삶의 불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는 왜 경계 위에 서게 되었을까. 왜 계속 밀려나고 흔들리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경계를 떠날 수 없는 걸까. 그는 분명 밀려난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 모든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나의 추측처럼)시로써 기억을 간직하는 일이 곧 같은 슬픔을 가진 이들의 기약 없는 만남을 위한 것이라면, 시로써 그 슬픔의 기원까지도 짐작해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바람뿐이다.

 

 

무거울수록 더 크게 웃고 많이 떠들게 된/내가 드러날까봐 자꾸 가정법으로 말한다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은 말은/아무 말도 아니다/그것은 그냥 소리에 가깝다

 

눈을 찢고 들어오는 것이 너무 많아서/시선을 땅에 두고 걷는다

 

(...)

 

행복과 슬픔 중 하나를 신으로 삼아야 한다면/슬픔을 선택할 거라는 당신이 떠오른다

 

행복은 마침표가 되기 쉽고/슬픔은 반드시 시작점이 된다고

 

나는 당신이 보호색 쓰는 것을 본 적 없다

- 「보호색」 중

 

 

시인의 세계 중 슬픔에 대한 태도가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작품인 위 시에는 크게 '나'와 '당신'이 등장한다. '나'는 '너무 많'은 것에 '시선'이 닿는 사람이다. 많이 본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슬픔을 본다는 것. 따라서 너무 많은 것을 삼키고 있는 '나'는 그 무게를 감추기 위해 '더 크게 웃고', '가정법으로 말하'고, '그냥 소리에 가까운' 말을 뱉으며 침묵하는 사람이다. '시선을 땅에 두고' 걸으며 애초부터 지기 힘든 무게를 지지 않으려고도 한다.

 

하지만 '당신'은 '나'와 같은 '보호색'을 쓴 적 없는 사람이다. '마침표'가 될 행복 대신 차라리 '시작점'이 될 슬픔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다음이 없는 행복 대신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는 슬픔을 신으로 삼는 '당신'은 경계에 선 삶의 슬픔을 감내하는 '그'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침묵하고 범주 속에 들어가기보다는,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발 끝을 꼿꼿이 세우는 '당신'. 하지만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단도 없이 홀로 경계에 선 '그'는 정말 언제까지나 그일 수 있을까? 필연적으로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 슬픔이라면, 그런 신을 따르는 '그'는 끝내 어디로 향하게 되는 것일까.

 

 

 

반대편에서 만나


 

 

당신의 침묵이 말보다 두꺼워졌을 때

당신과 연결된 것들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당신은 태어나기 위해 죽는 중인지도 몰랐다

 

(...)

 

표피를 뚫고 땅속으로 걸어가는 당신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때 당신의 등은 당신의 침묵과 닮아서 두드릴 수 없었다

 

(...)

 

반대편에서 만나

나는 흘러간 당신에게 약속한다

 

서로 다른 시간에 서 있더라도

관통해본 사람은 어디든 존재하는 법을 알게 될 테니"

 

- 「반대편에서 만나」 중

 

 

경계 위의 불안과 슬픔을 더 이상 맨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당신'은 경계 안도, 밖도 아닌 경계 저 아래로 파고들기를 택한다. 말해야 할 것을 삼키기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기를 택하는 것이 그의 '살아 있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솔직한 말보다 방어적인 침묵이 두꺼워진 지금 '당신'은 분명 '죽는 중인지도' 모른다.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존재의 등은 원치 않는 침묵처럼 날카로워서 '나'는 그 등을 차마 붙잡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은 시작점이 될 슬픔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었으므로, 이 죽음은 모든 것을 끝맺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만약 '당신'이 정말 끝내기를 원했다면 경계의 안팎 어디든지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흘러가버린 당신에게 '반대편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당신'은 아주 가버린 것이 아니라, 둥근 지구를 뚫고 내려가 모든 압력과 온도를 견디며 그 속에서 다시 '태어나'려는 것임을 안다고 선언한다. 지금은 '당신'의 융해를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아직 죽지 않은 내'가 이미 죽어 '태어나지 않은 당신'이 있을 반대편까지 가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이 만남은 언제가 됐든 꼭 이뤄질 수 있다. '관통해본 사람은 어디든 존재하는 법을 알게 될 테니', 다시 태어난 '당신'과 '나'는 어디서 만나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

 

가끔은 위태로운 경계를 떠나고 싶어져도, 우리가 우리로서 만날 것을 포기하지 말기. '온몸이 작열감에 점령'되어도, '서로 다른 시간에 서 있더라도', 반드시 서로를 마주하려는 이 충실한 약속은 더없이 사랑스럽다. 쓰는 것은 슬픔과 상처이지만, 이 기록을 통해 기억하려는 건 결국 모든 슬픔을 관통하고 선 사랑일까. 햇볕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자꾸 눈을 감고 싶은 여름에도 이런 약속과 함께라면 지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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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유솔
테두리에 사는 사람을 먼저 읽어보고 싶네요! 흘러가는 감정을 한 단어, 아주 짧은 문장에 담아내는 시는 맥락 없이도 읽히는 서사 같단 생각이 드네요. 덕분에 좋은 시집 알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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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9 22:33:2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