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필연의 세 가지 이름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글 입력 2024.11.2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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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을 도넛으로 만드는 것, 매끈하게 코팅된 설탕시럽도 고르게 올려진 초콜릿칩도 아닌 그것.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

 

구멍, 구멍입니다.

 

당신은 도넛이 아니라고 믿습니까?

당신에게는 구멍이 없다고 믿습니까?

 

- 「구멍의 존재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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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사랑, 멸종


 

파장이 맞는 시집은 이렇게 미끄러지듯 읽힐 수도 있구나를 실감하며 평소보다 훨씬 빠른 호흡으로 시인이 그린 세계를 읽어내려갔다. 온갖 생각을 주워먹고 점점 커지는 "머릿속의 구멍"(「괄호가 사랑하는 구멍」)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구멍'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구멍의 존재론」)로 끝나는 유선혜의 세계. 마지막 장을 덮음과 동시에 언젠가 스치듯 접한 유명 애니메이션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그 작품의 주인공은 강한 식탐을 가진 인물로, 매일 달고 사는 도넛은 그 캐릭터의 아이덴티티와도 같은 것이었다. 핑크색 초콜릿 코팅 위에 형형색색의 스프링클이 가득 뿌려져 있는, 보기만 해도 혀가 아릴 만큼 달콤한 도넛. 도넛의 생김새는 언제나 동그랗고 귀여웠지만, 막상 그 캐릭터는 자신의 식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짤막한 설명을 내놓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마음에 남긴 구멍을 이렇게 도넛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어느 시즌의 어떤 에피소드인지, 어떤 맥락에서 나온 대사인지, 정확히 어떤 표현을 썼는지도 어렴풋하지만 그 쓸쓸한 뉘앙스만은 기억한다. 이후 정보를 찾아보니 그는 폭력적인 교육 방식을 가진 아버지, 다정했지만 자신을 두고 떠난 어머니의 영향 아래 꽤 칙칙한 유년기를 보낸 캐릭터였다. 뻥 뚫린 마음을 똑같이 뻥 뚫린 도넛으로 채우려고 하니 그는 항상 배가 고팠다. 구멍난 마음을 구멍난 도넛으로 채우려는 아이러니. 위상수학에서 도넛과 인간은 같은 형태(한 개의 구멍을 가진 것)를 가진 것으로 취급된다.

 

 

가령 정신? 마음? 영혼?/혹은 유식하게 심적 속성?/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만,/편의상 영혼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그곳에도 구멍이 있을까요?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어요.

 

살아가는 모든 것의/타고난 결핍/타고난 허무/타고난 무의미/타고난 균열/타고난 어긋남/이것들에 붙일 알맞은 이름을 생각했어요.

 

구멍/오래도록/구멍

 

생생하게 우리를 찾아오는 빈자리. 나는 이것들을 구멍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영혼에도 구멍이 있다고 믿고 있어요. 

 

(...)

 

생생하게/나를 관통하는/압도하는/그것/영혼을 영영 혼자이게 하는/펄펄 뛰며/ 채워 넣기를 명령하는 그것

 

사랑이나 정의, 투쟁 혹은 혁명으로도/틀어막을 수 없는 틈새/없는 것들로 정의되는/여집합으로만 서술할 수 있는/고집스러운 빈자리

 

- 「구멍의 존재론」 중

 

 

배가 터질 듯 음식을 밀어넣어도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궁극적인 허기는 시인이 말하는 "생생하게 우리를 찾아오는 빈자리"와 닮아 있고, 닿아 있다. 사실 그것은 도넛을 사랑하던 한 캐릭터의 슬픈 유년기처럼 '뚜렷한' 계기, 상처, 혹은 결핍이 아니더라도(만약 이들이 뚜렷하다면 구멍이 더욱 커질 수 있겠지만) 언제나 우리의 본질로서 우리와 함께 한다. 시인에 의하면, 이 "구멍"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처음부터 "타고난"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콤한 것을 덮어씌우든, 어떻게 모양을 바꿔보든, 도넛이 도넛인 이상(인간이 인간인 이상) 구멍은 반드시 존재하며 결코 완전히 메워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음식도, 사랑도, 정의도, 그 어떤 시도도 구멍의 완벽하고 매끈한 봉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 사이로 줄줄 새어나가는 영혼을 붙잡고 살아가기 위해선 "세계의 의미나 인생의 허무에 대한 과도한 망상"(「괄호가 사랑하는 구멍」) 같은 것들에는 마땅히 '괄호를 쳐두어야' 한다. 부담스러운 심연을 내보이는 대신 “구멍을 감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구멍의 존재론」)다고도 한다. 하지만 모두 쉽지는 않은 일이다. "삶에 대해 자꾸 논하고 싶은 게 제가 걸린 병"(「괄호가 사랑하는 구멍」)이라고 초장부터 고백하는 시인처럼, 살아 있다 보면 자꾸 스스로를, 그 안의 구멍을 들여다보게 되니까.

 

그 불가역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시인의 세계에는 반복적으로 허기와 결핍 그리고 그를 채워보려는 시도들의 흔적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온 세상이 고통이라서 허기에 늘 집니다"라는 말로 설명되는 연인의 살집(「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처럼, "먹다 남긴 라면"(「일란성 슬픔 쌍둥이 슬픔」)처럼.

 

 

너는 그걸 괴물이라 적고 나는 그걸 허기라 적지만 우리의 묘사는 정확히 같다 추운 밤에도 펄펄 끓는 것 손을 가져다 대면 너무 뜨거워 얼른 뒷걸음질치지만 꼭 자꾸 아른거리는 가물거리는 그것 밤마다 자꾸자꾸 욱여넣고 싶은 그것

 

- 「일란성 슬픔 쌍둥이 슬픔」 중

 

 

"추운 밤에도 펄펄 끓는" 열기와 같이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며 "자꾸 아른거리는" 영혼의 결핍. 유선혜의 시어를 따라 그속을 파헤치다 보면 구석에서 작은 의문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이 모든 시어들의 묶음을 대표하는 문장은 계속해서 인식되는 구멍과 그 필연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라는 알쏭달쏭한 요청인 걸까. 각자의 방식으로 강렬한 뉘앙스를 가진 이 두 단어를 우리에게 내놓은 이유는 뭘까.

 

 

공룡은 운석 충돌로 사랑했다고 추정된다/현재 사랑이 임박한 생물은 5백 종이 넘는다/ 우리 모두 사랑위기종을 보호합시다

 

어젯밤 우리가 멸종의 말을 속삭이는 장면/아주 조심스럽게/멸종해, 나의 멸종을 받아줘/우리가 딛고 있는 행성, 멸종의 보금자리에서

 

공룡들은 사랑했다 번식했다 그리하여 멸종했다/어린아이들은 사랑한 공룡들의 이름을 외우고/분류하고 그려내고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아이들은 멸종하고


-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중

 

 

위 시에서 '사랑'과 '멸종'은 위치가 뒤바뀐 채로 문장 속에 자리하고 있다. 들이밀어진 그대로 한번, 제목의 요청에 따라 몇몇 단어를 바꿔넣은 상태로 또 한번을 읽어본다. 어떤 방법으로 읽든 그 나름대로 문장이 성립하는 것 같다.

 

"공룡은 운석 충돌로 사랑했다". 어쩌면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기에 사랑 같은 걸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 사랑이 임박한 생물은 5백 종이 넘는다". 사랑은 유기체의 숙명 같은 것이니 곧 사랑에 빠지게 될 존재야 여기저기 널렸다. "우리 모두 사랑 위기종을 보호합시다". 그럼에도 이제는 세상에서 사랑을 찾아볼 수 없다는 위기론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고, 그런 필멸의 존재에게서 비롯한 것들 역시 언젠가 흩어져버릴 것이므로 우리의 말(사랑의 말)은 곧 "멸종의 말"이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멸'뿐이다. 그 확신만큼, 그 절대성만큼 너를 "멸종해"(사랑해) 하고 속삭여 본다. 수많은 것들이(공룡도, 어떤 멸종 위기종도, 사랑도, 어쩌면 우리 스스로까지도) 사라져가는 "멸종의 보금자리"에서, 그럼에도 발을 "딛고" 존재하는 이상 본능처럼 사랑을 하고 마는 이들이 모인 이 행성에서.

 

공룡들은 사랑했고 번식했고 그리하여(and) 멸종했다. 사랑과 사라짐이라는 유기체의 숙명. 아이들 역시 세상을 통해 그 숙명을 배우고, 발을 들이고, 또 멸종할 것이다. 존재했기에 사랑했고 존재했기에 멸종한 공룡처럼. 어쩌면 역일지도 모른다. 공룡들은 멸종했고 번식했고 그리하여(therefore 혹은 그러므로) 사랑했다. 언젠가 사라질 것들만이 서로를 애틋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낯선 자리에 들어앉은 단어들은 묘한 이질감과 개연성을 함께 품고 있다. 사랑과 멸종. 멸종과 사랑.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우리, 언젠가 사라져버릴 우리. 필연성이라는 접점이 두 개념을 은근히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끝이 있기에 애틋하고 애틋하기에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기에 끝이 있다. 이미 없었던 것이 다시 한번 없어질 수는 없는 것처럼, '사라져 감'은 '한때 있음'의 반증인 것처럼.

 

그리고 이런 '사랑'과 '멸종'의 관계는 '구멍'과 우리 존재의 관계와도 닮아 있다. 사랑, 정의, 투쟁, 혁명. 그 방식이야 어떻든, 구멍을 메워보려는 애틋한 시도들, 지금 내가 존재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 시도들은 결국 구멍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니까. 반드시 사라질 우리이기에 반드시 사랑을 하고 마는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갖고 태어나는 구멍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든 메워보려고 발버둥친다. 구멍, 사랑, 멸종. 결국 이 단어들은 모두 우리 존재가 처한 필연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여러 가지의 필연 중에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고르는 마음을 존중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그는 조금은 엉뚱해보이는 요청으로 필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비틀고, 사랑과 멸종의 성질에 대해 골몰하게 한다. 정체성은 다른 존재와의 비교를 통해 정립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이 골몰은 멸종과의 비교에 기반한 사랑의 성질에 대한 탐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사랑의 달콤한 어감을 빌린 단순한 눈속임이나 회피가 아니다. '사랑'과 '멸종'이 이루는 순환적인 관계에서 우리는 결국 스스로를, 나의 '구멍'과 내가 이루는 관계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천성적인 영혼의 결핍을 한없이 허무한 것으로만 바라보지 않도록 이끄는 요청은 더없이 상냥하다. 그리고 이런 상냥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모두에게 '내면'의 깊이가 있으리라는, 또 그런 깊이에 서로 가닿을 수 있으리라는 시인의 믿음이다.

 

 

욕망하고 환희하고 경악하고 배신하는 내면의 존재를/손가락이 아프니까 괜찮다며 억지로 웃고 삶을 아끼니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쉽게 절망하니까 쉽게 의지하고 의심하니까 묻지 못하는 마음을/나는 나만큼의 내면을 가지고 당신은 당신만큼의 내면을 가지고 우리는 꼭 인간만큼의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나는 믿는다 (...)

 

내면이 멸종한 행성을/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외로움이 있어 (...)

 

우주는 팽창하고 모든 점은 멀어진다고 해도/다가가는 찰나가 있어/미시적인 순간이 있어/징그러워서 뒷걸음치더라도 끔찍해서 비명을 지르고 싶다가도 결국 만나게 되는

  

- 「충돌에 관한 사고실험」 중

 

 

"욕망하고 환희하고 경악하고 배신"하며 속 시끄러운 온갖 감정들을 품은 우리, 그래서 비로소 살아있다고 칭할 수 있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내면을 가진 행성이다. 이 행성들의 "내면"이 끝내 "멸종"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지금껏 시인이 '구멍'으로 칭해온 "거대한 외로움" 때문이다. 시인은 그 생명력과 존재감을 믿는다.

 

"끔찍해서 비명을 지르고 싶"어지는 서로의 구멍은 아무리 "징그러워서 뒷걸음치더라도" 언젠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우주가 "팽창"하는 동안 행성들은 멀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다가가는 찰나"가 존재한다. 시인은 그 만남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 믿음대로라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구멍만큼 선명하게 존재하고, 무언가와 멀어질 수 있는 만큼 무언가를 맞닥뜨릴 수도 있으며, 그 만남은 "미시적인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언젠가는 분명 성사될 것이다. 우리의 이 모든 필연을 감싸안는 하나의 단어를 고른다고 한다면, 이왕이면 가장 달콤한 것을 고르고 싶은 마음. 바로 그 마음에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라는 시인의 요청이 출발한 것 아니었을까.

 

이것이 언젠가 '멸종'할 것인 줄을 알면서도 만남의 순간 잠시나마 서로의 '구멍'을 '사랑'으로 메워줬으면, 그렇게 모든 종류의 필연이 사랑의 형태로 현현했으면. 모든 문장의 마지막 자리에 결국 사랑을 놓고 싶은 그 마음을 생각하면, 결국 나 역시 요청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너의 구멍을 사랑해, 너의 멸종을 사랑해. 이 문장들을 다정히 바꾸어 읽어보십시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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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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