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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2025년이 끝나갈 무렵 올해의 영화를 만났다. 영화 시라트다.

    

이 작품은 이미 지난 5월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의 영예를 안고, 9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 관객과도 만난 바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1월 멀티플렉스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제의 선택을 추종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두시간 동안 골몰해 본 영화가 어느 한 구석에서는 의미가 있으리라는 전제는 인지적 부담을 덜고 몰입을 허락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균질적인 만족도를 보장하는 인스턴트 보다 내리는 사람의 취향을 좀 타더라도 필터 커피가 좋다.


 

시놉시스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레이브 파티

그곳에서 루이스는 아들 에스테반과 함께 실종된 딸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곧 그 길은 신의 심판대로 이어지는데...


전례 없는 충격의 논쟁작

이 영화를 감당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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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공간적 좌표는 전반적으로 모호하다.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상황이 제시되기는 하지만, 그 구체적인 맥락까지는 유추하기 어렵다. 공간 역시 촬영은 모로코의 아틀라스산맥에서 이루어졌으나, 극 중 지역에 관한 언급은 생략되어있다.

 

그 탓에 영화 초반, 관객은 쉽게 몰입하기 어렵다. 첫 장면부터 사막 한가운데서 이질적인 사운드에 몸을 맡긴 군중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레이브 파티를 벌이고 있다. 전자음악을 중심으로 밤새 이어지는 대규모 댄스 파티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세계관과는 어딘가 어긋나 보인다.


모호함은 배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물들의 역사 또한 대부분 가려져 있다. 딸을 5년 동안 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군인들의 통제를 뚫고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할 당위는 어디에 있는가, 자드 일행은 어떤 관계로 묶여 있으며 왜 팔다리 하나씩을 잃었는가, 그런 것들을 구태여 알려주지 않는다.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은 것이 감독의 의도라고, 그런대로 짐작은 간다. 감독이 스스로를 뛰어난 스토티텔러 보다는 이미지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유형의 연출자라고 말한것처럼, 관객들은 이미지들이 결합되면서 생겨나는 의미와 감정의 힘에 대한 그의 믿음에 착실히 이끌려간다.

 

이 글에서는 『씨네21』에 실린 올리비에 락세 감독의 인터뷰를 다수 인용하며 감상을 이어가고자 한다. 서사 외적으로 사운드 디자인이나 캐스팅 비화가 궁금하다면, 인터뷰 전문을 함께 참고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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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 속에서도 남은 잔상은 '순전한 호의'와 '죽음'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루이스 부자가 레이브 파티 현장에서 딸을 찾는 전단을 돌리다가 만난 자드 일행은 몸과 얼굴에 있는 상흔 탓인지 참으로 불량해보인다. 그러나 이후 이들의 행보는 오히려 루이스와 이스테반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데 가깝다. 사막을 달리기 볼품없는 루이스의 차가 강을 건너지 못하자 차를 끌어 강을 건너게 하고 조금이라도 기름을 아끼라고 짐을 대신 실어준다. 모두가 예견한 배신의 순간 우회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들의 차와 함께 관객 역시 이들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들은 또한 루이스의 상실에 진심으로 공감한다.

 

자드 일행의 행동을 개연성의 문제로 환원한다면, 루이스가 기름을 사주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이들의 호의는 그런 계산이나 부채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베푸는 친절을 종잡아 '인간적'이라고 표현할 수조차 없다. 오늘 날 인간 세상에서 대가 없는 호의라는 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생존이 직결된 상황 속에서, 자드 일행이 보여주는 당연한 듯한 친절은 의문에 가까운 감탄을 자아낸다.


레이버들은 펑크족, 해적, 집시, 그리스인이라는 개별 특성을 가진다. 이들이기에 가능한 이유에 대해 감독은 그들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태도를 꼽는다. 서구 사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만들려 하는 동안, 실상 심리적으로 가장 병들어 가고 있는 이들 역시 바로 자신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훨씬 성숙하게 자신을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상처 난 마음의 틈으로 빛이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들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고 한다. 사막에서 레이브 문화를 즐기는 이들은 자유나 일탈의 상징이 아니라, 상처를 감추지 않기에 타인의 고통에도 닿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보이지 않는 시라트를 건너


 

시라트라는 제목은 아랍어에서 유래한다. 최후의 심판 날, 모든 인간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지옥 위의 다리를 뜻하는 말이다. 오직 의로운 자만이 다리를 건널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이는 불에 타는 형벌을 받는다. 글쎄, 죽음이 언제 선악을 가린적이 있었나 싶다. 에스테반의 죽음은 그 어떤 도덕적 판별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도래한다.

 

영화는 그 죽음을 시각적으로, 그리고 청각적 표현한다. 그 장면들은 현대 미술 전시장에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행위 예술을 송출하는 브라운관을 연상시킨다. 군중이 떼 지어 춤추는 영화의 첫 장면과, 장례 의식에 비견될 만한 두 번째 춤의 장면은 분명한 대구를 이룬다. 삶의 도취와 죽음의 의례가 동일한 몸짓으로 반복된다.

 

감독은 이 작품을 두고 “죽음에 관한 영화이자, 무엇보다 삶에 관한 영화”라고 규정한다. 칸영화제를 충격에 빠뜨린 잔혹한 전개 역시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인물들을 특정 지점으로 밀어붙이기 위한 장치라는 설명이다. 그가 말하듯, 등장인물들이 마주하는 무자비한 밑바닥은 그들을 ‘잃을 것 없는 상태’로 몰아넣고, 그 순간에야 비로소 스스로와 정면으로 대면하게 만든다. 이러한 극한의 조건은 인물들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어, 이전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지평을 연다. 그는 이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은 어렵지만, 죽음에 가까운 경험 속에서의 변화는 가능하다”고 덧붙이며, 〈시라트〉가 반드시 필요하고도 긍정적인 고됨을 품은 영화라고 강조한다.

 

초반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이 영화의 배경은 끝내 구체화되지 않는가. 감독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리적인 서사 속에 형이상학적인 모험을 담는 것이 목표였다. 다시 말해 추상화 없이 추상화하기를 통해 우연히 상징의 다른 층위를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관객이 꼭 이해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층위들이 극에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긍정적인 고됨은 스크린 너머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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