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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죽은 예술을 소생시키기 위한 이 시대의 진단 - 예술은 죽었다

예술 기획자 박원재의 '예술은 죽었다'

by 유수현 에디터
2025.11.2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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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예술의 가치를 증명하는가


 

나는 무엇이 훌륭한 작품인지를 판단하려면 어떠한 지표보다는 그저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는 편이다. 물론 ‘판단’이라는 표현 자체가 예술과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특정한 작품이 미술 전반의 흐름에서 갖는 의미를 평가한다는 건 그 앞뒤의 맥락이 충분히 확인된 후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미술을 업으로 삼는 수많은 주체들, 그중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먼저 발굴해야 하는 갤러리스트나 딜러, 큐레이터나 평론가 등에게는 무의미하다. 이들은 현장에서 숨쉬는 예술 역시도 평가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곧 정답 없음을 포용하는 예술의 특성에 예술산업의 현장에서 요구되는 또 다른 자세가 뒤섞인 결과다. 그러나 그 끝에 생겨난 수많은 기준들은 여러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예술의 숭고함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과도한 엘리트주의나 제도화의 문제를 낳았고, 거래액이나 관객수 등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지표가 작품의 유명세를 대변하는 모양새도 당연시되어 버렸다.


그러나 학계나 시장이 예술 본연의 가치를 완전히 입증하는가를 묻는다면, 흔쾌히 대답할 수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죽었다』는 그러한 뭉툭한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답변이 유의미한 이유는 바로 저자의 이력 때문이다. 저자는 국내 중견 갤러리의 대표주자 중 하나였던 원앤제이갤러리의 대표이자 예술 기획자로, 국내 미술계의 현주소를 생생히 경험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그 끝에 외치게 된 이 강렬한 질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본문 속으로



 

“전통 사회에서는 동일성과 강제된 규율이 공동체를 유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강제된 일체감을 요구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각자 알아서 살자는 무관심은 공동체를 해체시킨다. 결국 ‘다름 속에서 공존하는 방법’을 새롭게 찾아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는 제도적 장치를, 경제는 이해관계 조정을 시도하지만, 감정과 정체성, 존재에 관한 질문까지 아우를 수 있는 영역은 오직 예술뿐이다. (중략) 사회는 정답을 찾고, 법은 기준을 세우며, 경제는 효율을 따진다. 하지만 예술은 질문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지속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 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기여다.” (pp.126-127)

 

 

저자가 책 전반에서 전제하는 예술의 가치는 이렇다. 바로 공존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라는 점이다. 예술을 인문학의 산물로만 규정한다면 학문의 대상에 갇히게 되고, 장식적인 오브제로 취급한다면 시장 가치로만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질문’을 남기는 것은, 예술이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삶과 분리된 예술은 의미를 잃지만, 삶과 얽힌 예술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렇다고 예술이 반드시 사회 참여적이거나 정치적이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예술은 아름다움, 상상력, 개인적 표현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삶과 연결될 때, 예술은 치유와 공존의 플랫폼으로서 특별한 힘을 발휘하며, 서로 다른 우리를 하나로 묶는 다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은 삶의 중심에 서 있을 때 가장 빛난다.” (pp.180-181)

 

 

위 본문처럼 정치나 경제는 비록 실천적 영역은 다를지언정 더 큰 효율과 공의를 향해 기울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어떠한 가치나 역할, 의미를 저울 달지 않는다. 내가 서두에 언급한 대로 아직 완결되지 않은 동시대의 작품을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이 다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예술은 정답 없음을 추구하는 유일한 영역이며, 굳어진 정답을 경계하는 유일한 영역이라는 점에서 무한한 질문을 우리 삶에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결국 가치 있는 예술은 한편으로 얼마나 유의미한 질문을 제시하느냐의 문제와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물론 양식이나 기법 등에 있어서도 작품의 주제를 호소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이 맞물려야 하지만, 그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그 메시지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감상자들의 삶과 얼마나 연관되어 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술은 ‘앎’의 영역으로 치우쳤다. 감상하고 분석하며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고, 화려한 이미지로 포장된 채 삶의 경험과 분리되었다. (중략) 예술이 삶에서 멀어진 결과, 사람들은 미술관에 걸린 작품을 보며 ‘이게 뭐지?’라는 물음만 남기고 떠난다. 대다수가 좋다고 느끼는 예술이 반드시 훌륭한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를 설득하지 못하는 예술이 과연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p.209)
 

 

이 지점에서 저자는 미술관의 역할에 의문을 제시한다. 본문에 의하면 미술관에 들어간 예술은 저자가 강조하는 ‘삶과의 연결’을 끊어버린다. 책 1부의 초반부에서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술관에 들어간 예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예술은 관람객의 삶과 분리되어 오히려 손댈 수 없는 성물처럼 변모한다.(p.22)” 이러한 설명은 곧 미술관이 우리 삶 바깥에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이 점에서는 국내 미술 현장의 어쩔 수 없는 빈곤함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업계의 종사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일반 대중은 예술의 가치를 미처 삶에서 체득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그나마 대중적 소비층이 존재하는 실용예술 분야와 달리 순수예술 분야는 대중의 삶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이는 그저 인식의 부재, 국민성의 문제 정도로만 치부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아픔을 떠올리면, 미술사적 맥락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순수미술의 경우 근시대의 토양이 빈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창작의 기반을 문제삼는 상황에서 감상의 기반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창작의 기반이 바로세워지면, 감상의 기반은 자연히 따라온다.

 

 

 

본질로의 회귀



 
“소장은 예술의 정점이고, 체험은 그 여정을 가증하게 하는 입구다. 우리는 더 많은 입구를 열어야 한다. 더 넓은 길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시장을 키우고, 창작을 존속시키며, 예술이 다시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p.249)
 

 

저자 또한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아이웨이웨이 등 삶과 연결된 예술을 대변할 수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더 넓은 길을 제시’하기를 주장한다. 그 방식에 대해서는 인상주의의 출범을 촉발한 카메라의 발명처럼 새로운 예술의 도래로 이어질 만한 AI의 등장, 소셜 미디어로 시도해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예술적 소통, 상업 분야와의 컬래버레이션 등 여러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 여러 아이디어의 목적은 결국 위의 인용처럼 ‘예술이 다시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하기 위함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비전을 엿볼 수 있다. 예술의 본질을 일깨우기 위해 그 감상의 방식이 새로워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건강한 질문을 던지는 예술 창작이 회복되어야 하며, 그로 인해 예술이 미술관의 기록물이 아닌 삶의 일부가 될 때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은 체험에서 소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통찰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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