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라는 공간이 있다. 우리는 익히 들어봤고, 한 번쯤은 발을 들여보았을 것이다. 박물관은 역사적 유물이나 자료, 예술품 등을 박제하고 전시함으로써 관람객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다. 이 지점에서 '박제'와 '전시'라는 키워드에 주목한다. 두 단어는 능동이 아닌 피동의 위치이다. 작품은 스스로가 아니라 박물관이라는 제도에 의해 박제되고 전시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놓인 작품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오직 관람객들의 정보 수집과 관람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설명할 힘을 상실한 채 오로지 제3자에 의해 정의된다. 여기서 관람객이자 제3자인 이들은 높은 눈높이에서 박제당한 작품들을 내려다본다. 예술은 현재 그런 위치에 있다. 살아 숨쉬어야 할 예술은 박제된 채 죽어있다. 예술은 박물관화되었다.
예술은 죽었다
저자는 원앤제이 갤러리를 설립하고 한국의 여러 작가들을 세계 무대에 올린 예술 기획자 박원재이다. 제목과 프롤로그 모두 '예술은 죽었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은, 현재 상업화와 엘리트주의로 인해 본질을 잃은 예술에 대해서 분석하고 그 방안을 모색한다.
1부, 예술은 왜 멀어졌는가에서는 예술이 현재 마주한 상황에 대하여 근본적인 실마리를 잡아본다. 예술의 죽음은 한 사람이나 한 사건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라고 한다. 그 요인들이라 함은 먼저 예술가들 스스로의 발언이 시작점인데,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과 같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예술 개념에 대립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관념을 무너뜨렸고, 이들의 선언은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낳았다. 아서 단토는 예술은 이제 더이상 시각적 아름다움 뿐만이 아닌 그 배후의 개념과 의미가 중요해졌다며, 이는 예술의 본질을 변화시켰고 결국 '예술의 종말'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예술을 위한 에술'이 예술의 죽음이라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면, 목표지향주의와 엘리트주의, 예술의 상업화와 자본주의는 그 포탄을 터뜨린 것이다.
2부, 본디 예술은 살아있다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 이전의 삶과 함께 살아갔던 예술에 대해 고찰한다. 오늘날의 예술은 개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특정한 지식이나 논리를 이해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우리 삶에서 우러나온 존재였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예술은 점점 삶과 분리된, 어떤 '공부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저자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나 안토니 곰리의 〈필드〉, 캐리 메이 윔스의 〈키친 테이블 시리즈〉 등 예술이 삶에 어떤 상관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이는 얼마나 중요한지를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소셜 미디어와 AI의 출현이 예술에 미칠 영향과 가능성을 살펴본다.
3부, 일상으로 돌아온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에서는 결국 예술은 삶과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예술로 살아있을 수 있다는 답을 남긴다. 단순히 설명으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를 설명한다면, '작가가 일정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고, 관객이 돌아가며 그녀와 마주 앉았다.'가 다이지만 이를 체험한 관람객들은 기록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여러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눈을 마주친 순간 그들은 그들 각자의 삶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이와 같이 저자는 예술의 본질은 삶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각인하고, 예술이 다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책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했다. 위와 같이 저자는 '예술은 죽었고, 우리가 죽였다!'라고 외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예술을 살리고 싶어한다. 권력주의와 자본주의, 엘리트주의와 예술교육의 허점, 디지털 산업의 가속화... 이 모든 것들이 예술에게는 치명적인 독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이제 써내려가볼까 한다.
박물관화된 예술
서론에 언급했듯이 예술은 박물관화되었다. 내가 말하는 ‘박물관화’란 예술이 삶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권력과 제도에 의해 낮은 위치에서 소비되는 상태다. '박물관이 왜?'라는 물음이 들 수 있겠지만 박물관의 실상은 매우 권력적인 구조 위에 세워진 공간이다. 누군가에 의해 발굴된 작품들은 전시되고 박제되며, 전시를 위한 작품은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친다. 선발된 작품은 이름을 얻는다. 이름이 붙는 순간, 작품은 언어 안에 갇힌다. 그리고 그 언어에는 설명이 따라온다. 제3자에 의해 정의된 작품은, 이제 관람객들 앞에 선다. 관람객들은 정지된 작품을 내려다 보고, 재구성된 작품을 받아들인다. 정작 작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예술은 현재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저자는 이와 비슷하게 '미술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동시대 미술은 미술관에 들어가는 순간 그 의미를 잃는다. 동시대 미술은 관람객과의 대화, 사회적 맥락, 그리고 지금ㅡ여기의 현존을 요구한다. 그러나 미술관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예술은 하얀 벽에 걸리며 시간과 공간에서 단절된다. 그 결과 동시대 미술은 더 이상 '지금'의 예술이 아닌, 추상화된 '영원한 예술'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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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삶에서 태어났다. 깊이 들어가 보자면 일상과 종교에서부터 태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부른 음악이 농악이 되고, 사냥과 생존의 기록을 담은 기록은 벽화가 되었다. 예술은 본디 대단히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 그것이 예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은 달라졌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 할지라도, 그 변화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예술은 18-19세기 산업혁명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상품화 되었고, 작품에는 점점 더 많은 값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예술은 시장의 상황에 맞추어 변모했고, 삶의 동반자였던 예술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을 때, 예술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삶'이 아닌 '상업'의 도구가 된 예술은 권력자들의 손에 좌우되기 시작한다. 그들은 더 아름답고, 독창적인 예술을 원했고, 예술가들은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그들 역시 예술을 사랑하기에, 예술로 살아가고 싶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달랐어야 했다. 예술만은 상업의 노예가 되지 않고 숨쉴 수 있는 틈이 되어주었어야 한다. 이제 와서 이야기해봤자 터무니 없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권력자가 선택한 작품은 소수이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엘리트주의는 탄생한다.
엘리트주의가 이끌어가는 예술은 난해해지고 좁아지기 시작한다. 삶과 민첩하게 호흡하던 예술은 이젠 설명이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한 발자국 물러나 프레임 안에 갇힌 모습만을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술의 가치는 권력자에 의해 판별되며, 그들이 선택한 작품만이 미술관에 걸린다. 그리고 관람객들은 '아무런 힘이 없이 정지된 작품'을 감상한다.
권력자들이 선택한 과거는 역사가 된다
일전 필자의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역사는 권력 계층에 의해 정의된 것이라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가 사실인지 거짓인지가 아니라, 결국엔 그들의 입김이 불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겨진 것이 '역사'로 남는다. 사회는 늘 권력에 의해 움직였고, 예술 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좋은 대학, 좋은 연줄. 소수를 찬양하는 엘리트주의. 소수가 뽑은 예술가는 또 소수가 되고 그들은 예술가 중에서도 '성공한' 예술가로 치부된다. 그리고 자칭 엘리트들이 창작한 작품들은 미술관에 전시되며, 관람객들은 그저 감탄을 자아낼 뿐이다.
2022년,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전시가 전국 곳곳에 열렸다. 〈이건희 컬렉션〉은 고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생전에 수집했던 예술 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여러 도ㅡ시립 미술관을 거치며 국내에서는 약 262만명을 동원했고, 현재는 국외순회전을 돌며 워싱턴에서 전시 중이다. 그의 컬렉션에는 희귀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고 간 사람이 많았을까? 사실은 〈이건희 컬렉션〉에서 '컬렉션'보다는 '이건희'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의 최고 재벌이자 권력가인 '그'가 향유했던 예술이기에 접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리고 종종 생각한다. 의미가 있는 것을 가진 게 아니라, 누군가가 가졌기에 의미가 생기는 작품들도 있다고. 나는 이 전시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엄청나게 가치있는 작품들을 많이 수집했고, 기증했기 때문이다. 다만 난 예술이 '누가 소유했는가'에 따라 변모하는 의미와, 여기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엘리트주의를 떨쳐낼 수 없었다. 이후 생각을 굳혔다.
권력자들이 선택한 과거는 역사가 되고, 권력자들이 선택한 예술은 명작이 된다.
숨을 불어넣어 줄 차례
해결 방안이라는 건 참 어려운 존재다. 문제는 눈에 박힐 정도로 너무도 선명한데, 그에 대한 완벽한 답은 찾아내기 쉽지 않다. 현재 모든 문제들이 얽히고 섥혀있는 예술의 방향성에 대한 답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이제 우리는 예술에게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
저자는 몇몇 해결책을 제시한다. 예술을 '소장'만이 아닌 '체험'의 장으로 확장할 것, 산업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예술가만의 언어를 확장시켜나는 것. 물론 근본적으로 꼬인 줄을 풀 수는 없다. 이미 상품화된 예술이 상품화되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는 현재의 시점에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보아야 한다. 저자는 AI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AI가 예술가의 작업 과정 전체를 대체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 도구로서 창작자의 감각적 과정을 보조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술은 무엇보다 삶과 맞닿은 시대정신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변화에 탑승하지 않을 순 없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예술의 현재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술은 극단적으로 상업화되면 안 된다!' 혹은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 와 같은 생각들은 종종 해왔지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꽤 오래 전이었다. 나는 문제점에 대하여 인식은 하되 답을 찾는 것이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답을 찾을 수 있었다면 이 수십억 명의 사람들 중 누군가는 도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터무니 없는 방향성과 대안이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하고,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움직임으로 새로운 방향을 찾아왔고, 혁명을 이뤄냈다. 이 책은 예술의 현재를 계속해서 상기시켜준다.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있는 책이 아닐까.